"춘성, 無碍道人의 一代記"

2024. 6. 29. 05:14위정자를 향한 獅子吼

 

투철한 수행과 특이한 기행으로 유명한 춘성스님의 궤적을 살핀다.

춘성은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출신으로 본명은 이창림(李昌林)이며,

(1891년 3월 30일~1977년 8월 22일) 대한민국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요

문인(文人)이다.

그는 어려서 부터 기억력이 좋고 장대한 외모에 총명한 人物이였다. 

춘성은 무애도인(無碍道人)으로 불릴만큼 거침이 없는 호방한 성격이였다. 

 

13살에 출가하여 백담사의 만해 한용운을 찾아 갔으나 받아주지 않자

며칠동안을 꼼짝도 하지않고 그 자리에 있다가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아! 경계좋다, '이곳에서 살지않으면 어디에서 산단 말인가?"

라며 혼자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

한용운이 문을 열고보니 발가벗고 비를 맞으며 춤을 추고 있는 그의 기질이

보통이 아님을 알고 기뻐하며 그를 제자로 삼았고 만해의 유일한 제자가 되였다.

만해 한용운이 최초 창간한 잡지, "유심"의 필진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人物이다.

 

한용운이 옥고를 치룰때 옥바라지를 한것도 상좌인 춘성이였고,

1919년 29세 되던해 비가 내리던 어느날 스승이 방에서 집필에만 몰두하던

만해를 향해 "이 좋은날에 방에만 쳐 박혀 무얼 하느냐"

힐난하고 발가벗고 춤을 췄던 춘성의 기행은 일본 총독부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그가 넘지 못할 선이란 없었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한용운이 민족대표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됐을때

망원사에 기거하며 스승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방에 불을 땐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유인즉,

스승이 추운 감방에서 떨고 계신데 제자가 어찌 따뜻한 방에자겠는가? 

또한 만해가 쓴 "조선독립의 서"를 받아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에 건네 독립신문에

실리도록 했던 춘성은 부처님 말씀도 원색적으로 설법한 괴승이였다.  

어쩌다 새옷을 갈아입고 경성으로 외출한 춘성은 거지에게 새옷을 벗어주고 

화장실에 숨어있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팬티 바람으로 거처하던 절로 돌아온 일이

빈번하였다고도 한다.

춘성의 애민정신, "좋은 옷은 네가 입어라!"

우리 시대에 환생한 원효, 호방질탕한 선승이였다.

평생을 투철한 수행과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았으며 거침없는 육두문자의 풍자로

유명했고 화엄법문(여러가지 수행으로 만덕을 쌓아 덕과를 장엄하게 하는 일)의

대가가 바로 그였다.

 

 

 

춘성은 음담패설을 즐겨했지만 그에 대한 비판보다는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

대중들은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1940년 2월 어느 날 조선총독부의 창씨 개명 협조를 모두 거절하고

흥국사로 가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1944년 스승인 만해의 입적을 본 후 세상이 무상함을 탄식하고

모든것을 놓고 만공스님을 찾아 그의 가르침을 받았고 만공은 춘성의 말재주와

글쓰는 재주가 뛰어나 예사롭지 않음을 인지하고 "춘성"이란 법호를 내려 주었다.

 

춘성은 아무런 격의없이 육두문자를 쓰면서도 마음이 동하는 법이 없었고,

남을 책망하지도 않았으며 잘때도 방석 하나로 배만 덮고 잠시동안 잠을 잘 정도로

수행에 철저했으며 그가 머무는 곳의 대중들은 욕만 얻어 먹을 뿐이지만 대중이 그를

존경한 이유는 춘성이 자신에게는 엄격했지만 대중들에겐 자비보살이였기 때문이다.

"이불은 부처와 이별하는 덮개"라던 춘성,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은 수행자였다.

 

1950년 6,25 전쟁 직후에  산에 나무를 벌채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 되었을 때,

도봉산 중턱의 법당중수를 위해 벌목을 한 죄로 의정부 경찰서에서 심문 받을때 일화다.

형사가 고향을 묻자 "우리 엄마 보지요"라고 대답하자,

형사가 반복해 물어도 똑같은 대답을 해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한 형사는

이번에는 본적지를 묻자 "아버지 좃물이요"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형사는 실성한 사람이라 판단하고 돌려보냈다.

 

그후 박정희 대통령 재임시절, 춘성이 머물던 강화도 보문사에 독실한 불자였던

육영수가 방문하여 인사를 할때 "뽀뽀나 하자"고 달려들어 수행원들을 당황시켰다.

그러나,

평소 그의 농담을 잘 알던 육영수는 웃으면서 그의 농담을 받아 들였다.

불자들의 자선단체 모임의 명예회장이였던 육영수가 자기 생일에 춘성을 초대하여

박정희와 함께한 자리에서 특별히 법문을 청하자 춘성은 한참이 지난후,

사람들이 기다림에 한계를 느꼈을떄 법문을 설파했다.

그 중 한 마디가 "오늘은 육영수 보살이 지 에미 보지에서 응애하고 나온 날입니다"

하고 휑하니 나가 버렸다.

사람들은 이 법문에 놀라 당황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웃으면서 대단하신 분이라 

격찬하였다는 일화는 이미 세간에 알려진 일이다.

작금의 정치는 대통령의  부인인 김건희씨를 여사 존칭을 빼고 방송했다는 이유로 

방송심의위가 행정지도 처분을 내린것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1970년 당시 서슬퍼런 엄혹한 시절에 봉두완 앵커는 방송 시사 프로그램에서

최고권력자 에게도 거침없이 쓴소리를 했던 사람이다.

얼마후에 봉두완 앵커는,

육영수 여사의 초대를 받고 청와대를 방문했다.

그를 본 박정희는 여기 깡패왔구만' 오랫만이요, 봉두완씨.

절대권력자인 통치자도 사회적 년배를 초월해 존칭을 쓰던 박정희의 면모다.

기자를 에둘러 깡패라 부른 박정희는 이런저런 시국이야기를 했고,

자리를 뜨려는 봉두완 기자에게 우리 식구들 하고 저녁이나 함께하자고 했다.

 

가족식당에 모인 자녀들에게도 정중하게 인사하라고 지적했고,

놀랄정도로 간소한 식탁에는 그가 평소 좋아하는 시바스갈 한병을 따놓고

시국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얼큰해진 박정희는 우리 같이 밥비벼 먹을까? 

봉두완은 진짜 애국자같다! 방송 비판 잘 듣고 있어요,

무조건 비판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봉두완씨는 비판은 신랄하게 하지만

내가 보기엔 나라 걱정이 배어있어 좋다, 고 말했다.

얼마후에 청와대의 야당을 자처하던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흉탄에 쓰러지고

박정희 대통령 또한 1979년 10월 26일 부하인 김재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봉두완은 국장이 끝난뒤 이튿날 새벽 국립묘지에 나란히 묻힌 박정희내외분의

묘소를 자신의 부인과 함께 찾았다.

그 동안 시도 때도 없이 신랄하게 비판한 철없는 짓을 용서해달라 사과했고, 

평소에 내가 죽고나면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묘앞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그의 회고록에서 밝혔다.

 

지난날의 이야기를 자서전에 일기 형식으로 남기면 세상에 도움이될까 하여

글을 썼다는 봉두완, 그의 나이도 90대가 되었다. 

시대적 환경은 다르지만 오늘날의 산업근대화를 이룬 박정희 대통령은

强力했지만 정감어린 인간미가 존경심과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leader의 자리는 끊임없이 工夫하고 노력해야 하는 孤獨한 자리다.

하물며 한나라의 통치자라면 그 노력을 얼마나 해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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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은 차와 막걸리, 소주 맥주 술도 마셨고 담배도 피웠다고 한다.

그후 장좌불와를 시작한지 3년만에 건강이 나빠지고 치아도 모두 빠져 틀니를

할 정도였던 춘성은 한벌의 가사와 모자가 그의 전재산이였다.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한 생불(生佛), 

그뒤 춘성이 입적을 앞두고 있을때 그의 상좌가 춘성에게,

열반에 드신후에 사리가 안나오면 신도들이 많이 실망할 텐데요, 걱정하자

춘성은 "야! 이 씨발놈의 자식아 ! 내가 신도들에게 보여주려고 사느냐? 대노했단다.

 

춘성은,

1977년 8월 22일 오후 7시 의정부에 있는 망월사에서 입적했다.

그의 향년이 세수 87세 법납74세 였다.   

서울 화계사에서 영결식이 거행되고 서옹스님이 영결법어를 선언했다.

(영결 법어)

춘성 노스님 노니신곳, 삼세의 불조도 엿볼 수 없도다,

이 세상 걸림없이 한 바탕 진탕치고 어디로 가시는고,

서울 가두에 전신을 나투시도다.

 

"춘성 스님의 다비식"

 

그의 유언에 따라 꽃상여 대신 거적 몇개로 시신을 덮었으며 다비후에는

 황해바다에 뿌려졌고 장례식때는 평소에 춘성이 즐겨부르던 18번 곡,

"나그네 설움"이라는 노래를 승려들이 불러주었다고 한다.

해탈의 경지에 노닐던 무애도인 춘성의 궤적이다.

淸州j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