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理學의 泰斗, 聖賢"안향(安珦)"

2021. 4. 15. 04:39위정자를 향한 獅子吼

(부곡의 安子墓)

 

우리나라 性理學의 태두 "안향(安子)"

그는 경북 영주 순흥에서 태어난 고려 난세 시절의 대학자다

명현 유학자 문성공, 회헌 안향先生의 위패를 모신 곳(사진) 부곡"安子墓"

安子"子"공자, 맹자, 주자와 같은 성현에게만 부여되는 최고의 존칭으로

지금부터 7백여 년 전 몽고의 원나라는 中國을 무너뜨리고 우리나라를 침입한다

고려는 왕실을 강화로 옮겨 싸웠으나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아리따운 女人들과

함께 중국으로 끌려가고 결국 왕은 항복하고 中國으로 잡혀 가는 치욕을 당한다

또한 왕세자는 볼모로 잡혀 그 곳에서 교육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이때 고려의 충신 安珦(安子)先生은 원나라로 가서 오랑캐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 끝에 장차 나라의 젊은 이들을 교육혁명을 통해 국가안위를 튼튼히 하기 위해

당시 가장 발전된 學文 "주자학 전서"를 배우고 익혀 自國으로 돌아 온다

 

그리고 자기의 전재산을 털어 고려의 大學인 "국자감"에 장학으로 내놓고

여러 대신들에게 돈을 거두어 "양현고"기금을 만들어 젊은 학생들을 선발하여 "주자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하인 백여 명을 국자감의 직원으로 뒤를 돌보게 한다

그리하여 "정몽주" "이색"같은 충신이 배출되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주자학"을

통치 원리로 삼게 되었고 왕세자들은 모두 "주자학"을 가르치게 하여(훈요십조) 世宗大王

같은 聖君이 탄생되고 율곡 이이, 퇴계 이황 같은 분들이 "주자학"을 한국적으로 정립하여

더 완성된 이론을 수립하게 된다

후에 안향선생은 "성현"으로 추앙되었으며 결국 성현들이 모여 칭호를 정하는

중국 "연성부"라는 곳에서 회의를 열어 "안향"선생을 "孔子" "孟子" "朱子" 다음으로

"安子"라 부르기로 결정한다

그 뒤 왕은 대대손손 영구히 "安子"를 기려 기념하라 명하니 부곡에 모셔진 "安子墓"이다.

부곡 "安子墓"의 현판은 공자의 77代 후손 "공덕성"이 써서 보내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安子 이후 순흥 안 씨는 11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고 20명이 봉군 되었으며 17명의 대제학을

배출한다, 그 후 조선시대로 와서는 641명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국보1111호 안향 초상화"

(安子 先生의 초상화(국보 1111호)는 현재 영주 순흥에 있는 소수서원(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모셔져 있다)

 

1319년 6월에는 학교를 설립하고 인재를 양성한 공로를 기리어 왕명으로

安子선생을 공자 문묘(文墓)에 배향하게 된다.

현충사(이순신), 충의사(윤봉길) 같이 훌륭한 분들의 위패를 모신 곳을 사(祠)나

사당(祠堂)이라 하고 더 격위가 높은 임금이나 대학자를 모신 곳을 묘(墓)라 쓴다

역대 임금을 모신 곳을 종묘(宗墓), 공자의 위패를 모신 곳을 문묘(文墓)라 하고

명현 유학자요 성현으로 추앙받는 안향 先生을 모신곳이 안자묘(安子墓)이다.

 

"뮤직컬 안향"

 

주자학 은 공자(孔子 BC 552-479)의 가르침을 천오백 년 후 철학적으로 정리한

주자(朱子1130-1200)의 학설이며 우주의 근본 원리에 대한 哲學的 이론으로

그의 유학은 후대 동아시아 문화권의 지배적인 이념으로 정착된 학문이다.

이 시기에 西洋에서는 지구설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주자학은 이미 둥근 우주의

운행 원리, 시간과 공간의 이치, 인간의 근원에 대한 그에 따른 인간이 실천해야 할

도리(예절)의 실천적 이론을 집대성하고 있었으니 性理學의 우수함이다.

현대에 이르러 西洋의 많은 학자들도 "성리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참조/安子墓 친족회.

"淸州joon"

 

"오페라 선비"

대한민국 오페라 대상을 받은 창작 오페라"선비"

의로운 선비정신의 뿌리 유학과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선생의 노력과 사랑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