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대통령 경호원들의 師父`장수옥 특공무술협회 총재

2013. 3. 7. 03:33스포츠·golf 外

.

 

[김윤덕의 사람人]

'대통령 경호원들의 師父'장수옥 특공무술협회 총재

 

그가 만든 무술,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켰다

 

1978년 특공무술 창시

"北 격술 이길 무술 개발"軍의 요청 받고 만들어

朴대통령에게 극찬 받고 경호실·특전사 등에 보급

 

호랑이 사부로 유명

25년간 대통령 5명 보좌 TV로 경호 장면 보다가

방심하는 요원 발견땐 곧바로 무전 쳐서 혼쭐

 

무인(武人)의 기(氣)는 눈에서 나오고, 뼈에 새긴 결기는 육신이 쇠락해도 변하지 않나 보다. 칠순을 바라보는 장수옥(66)의 부릅뜬 눈은 흡사 호랑이였다. 엉덩이가 바닥에 닿을 듯 낮은 자세를 취한 노장은 당장에라도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상대의 명치를 가격할 태세다. 단신(短身)의 작은 몸집 어디에서 폭풍의 기운이 솟구치는지. 소심한 구경꾼들의 숨이 멎었다.

장수옥 대한특공무술협회 총재는 청와대 대통령 경호원들이 '사부(師父)'로 모시는 사람이다. 그가 1978년 창시한 '특공무술'은 청와대 경호실은 물론 육·해·공군, 특전사 등 전군에 보급됐다. 손바닥 하나로 적의 급소와 혈을 타격하는 평수법(平手法), 3m70㎝ 높이로 날아올라 상대의 명치를 가격하는 고축차기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1980년부터는 청와대 경호실에 입성, 대통령 경호원들의 무도 사범으로 활약했다. 장수옥의 특공무술 시범을 본 뒤 "전군에 보급하라"는 명을 내린 박정희부터 치면 김대중까지 5명의 대통령을 보좌한 셈이다.

올해는 청와대 경호처가 설립된 지 만 50년 되는 해. 대한민국 최고 반열의 무예인이자 대통령 경호의 산증인인 장수옥을 만났다. 그는 "미국의 경호 역사가 150년이라지만 대한민국의 경호력(力)이 세계 최고"라고 자부했다.

 

 

최강의 무인이지만 장수옥은“싸움은 피하는 것이 지혜”라고 말했다. 부득이 맞서야 할 상황이면“눈으로 상대를 먼저 제압하라”고 했다. 실제로 그에게 대련을 청한 강호의 무인들은 싸워보기도 전에 그의 호랑이 같은 눈빛에 두 손을 든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경호가 1%만 실패해도

―연세가 예순여섯인데도 정정합니다.

"아, 나이는 적지 말아요. 꼰대 소리 듣기 싫습니다(웃음)."

―건강을 어떻게 유지합니까.

"지금도 청와대에서 했던 스트레칭 동작을 매일 아침 한 시간씩 해요. 특히 무릎운동. 관절이 튼튼해야 발차기를 하니까. 순발력은 여전한데 지구력은 떨어졌어요. 청와대 처음 갈 때 고축차기로 3m70㎝ 높이의 송판을 깼지요. 요즘은 3m밖에 안 될 거예요."

―여성 대통령이 탄생해서 그런지 여성 경호원들 활약이 눈에 띕니다.

"남성 대통령 때에도 여성 경호원들 있었어요. 훈련을 남자랑 똑같이 시켰지요. 내가 가르친 요원만 30명쯤 될 거예요. 벌써 50줄 된 사람도 있고. 경찰서장 하는 친구도 있지요."

―호랑이 사부였을 것 같습니다.

"대통령 따라 해외 출장 다녀온 경호원들은 다음 날 쉬게 해주는데, 나는 여독이 풀리지도 않은 요원들을 바로 불러내 체력 측정을 시켰어요. 내가 밉겠지만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게 경호원입니다. 총을 차고 사는 사람들이니 사소한 일로도 불의의 사고를 일으킬 수 있지요. 경호 기술보다 중요한 게 정신무장이에요. 경호가 1%만 실패해도 우리의 국기(國基)가 흔들립니다."

―대통령을 직접 경호한 건 아니지요?

"경호원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지요. 총을 든 그들이 무서워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니까. 사부는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돈이 있는지 없는지 제자들에게 보여선 안 된다는 게 내 철칙이었어요."

―TV로 대통령 경호 현장을 지켜보다가 방심하고 있는 요원을 발견하면 바로 무전을 쳐서 벼락을 내렸다면서요?

"딴생각에 빠진 요원은 눈빛만 봐도 알지요.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고요. 방탄복을 입어 그렇기도 하지만 너무 긴장해 있으면 유사시에 날렵하게 대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훈련해야 합니다. 상황 발생시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이게끔.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만 해도 그래요. 경호원이 관중석을 주시하다가 움직이는 물체가 있으면 달려가 바로 제압해야 하는데, 엉뚱한 곳을 보고 있다가 사고가 발생하니 다시 엉뚱한 데다 총을 쏘았지요. 문세광이 튀어나올 때까지 뭘 하고 있었느냐는 겁니다. 경호원은 대통령 옆에 폼 잡고 서 있으라고 세워놓는 게 아닌데."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우리 경호력이 급속히 발전했다고 합니다만.

"경호의 중요성을 알게 된 전두환 대통령 때부터 노출 경호에서 은밀 경호로 바뀌었습니다. 그전에는 감색 양복에 파란 넥타이, 8대2 가르마가 대통령 경호원의 상징이었는데 그걸 감추기 시작한 거죠."

―경호원이라는 직무에 적합한 사람이 따로 있습니까?

"잔머리가 발달한 사람보다는 우직한 사람이 좋지요. 신입요원 때 상담을 해보면 알아요. 머리만 좋아서 몇년 뒤 몇급 공무원이 돼야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처세를 계산하는 아이들은 중간에 '빵꾸'가 나기 쉬워요.

공부는 좀 못했어도 우직하니 무도밖에 모르는 아이들이 낫지요. 문민정부 들어 경호원을 공채로만 뽑던데 장단점이 있어요. 퇴직할 때 경호실장더러 그랬어요. 2년에 한 번은 무도하는 아이들을 특채로 뽑아보라고."

 

◇나의 아내 '철선녀'

 

장수옥의 청와대 입성기는 절판된 그의 자서전 '대통령 경호원들의 영원한 사부'에 나와 있다. 강호의 고수로되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을 만큼 가난했던 그에게 606특공부대 요원들이 찾아온 게 1978년 여름이다.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사건'(1968년)에 자극받아 국내 최초의 대테러 부대로 창설된 606부대는 북한의 격술(擊術)을 능가할 새로운 무술을 개발하고 있었고, 그 적임자로 장수옥을 택했다.

신기(神技)에 가까운 무술로 특전요원들을 놀라게 한 무림의 고수는 합기도와 태권도를 바탕으로 한 특공무술을 개발했고, 606부대의 최고 책임자였던 노태우 당시 경호실 작전차장보, 차지철 경호실장에 이어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시범을 보인다. 장수옥의 특공무술이 대통령을 사로잡은 데는 시범에 함께 참여한 그의 아내 김단화(66)의 역할도 지대했다. 국선도 무예인으로 한때 '철선녀'로 이름을 날린 김단화는 이마로 7㎝ 두께의 송판을 깨고, 온몸을 10겹으로 휘감은 철사를 끊어내는 괴력으로 박 대통령과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한 박근혜를 놀라게 했다.

 

―책에 보니 606부대에서 호출받을 당시 홍콩에서 영화 출연 제의도 받았더군요.

 

"배우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집에 쌀이 없으니 도둑질만 아니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응했지요. 이소룡을 이을 무술스타로 키워주겠다기에 전속 계약을 했는데, 그때 마침 606부대원들이 찾아온 겁니다."

 

―갈등했겠네요.

 

"전혀요.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인데, 시나리오대로 따라 하는 액션배우에 비교가 되겠습니까. 다만 홍콩 가서 딴 짓 할까봐 집사람 요청으로 정관수술을 했는데, 실밥도 풀기 전에 606부대에서 무술시범을 보이는 것이 고통스럽긴 했습니다(웃음)."

 

 

철사도 끊는‘철선녀’이지만 김단화는 내조의 여왕이었다. “실세는 나였지만 자식들 앞에선 가장의 권위를 최고로 높여주었다”고 했다.

 

 

―특공무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태권도, 합기도 등 여러 무도에서 뽑아낸 장기에 호흡법을 결합시킨 무술입니다. 근접전에서 일격 필살하려면 강력한 무술이 필요하지요. 다른 무술의 정권지르기나 형(形-품세)은 근육의 힘을 지체의 끝으로 모아주는 게 기본이지만, 특공무술은 주먹지르기를 해도 손끝에 힘을 주지 않습니다. 팔을 뻗는 순간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도록 구성돼 있지요. 특히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괴력은 강력합니다. 장풍의 일종인 평수법은 특공무술의 절정이지요."

 

―특공무술이 북한의 격술을 이깁니까?

 

"북한 격술의 권위자를 국정원 소개로 만난 적이 있는데, 우리 특공무술을 보고 감탄하더군요. 러시아, 중동지역 등 경호 선진국이라는 곳에서도 비밀리에 견학 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에게 시범을 보이는 자리에 부인은 왜 간 겁니까.

 

"인왕산에서 내려온 철선녀라면 70년대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국내 TV는 물론 일본, 베트남 같은 국제무대를 누비며 무술 공연을 단골로 했지요. 흥행사라고 할까요. 박정희 대통령도 아내의 박치기 시범에 감탄했습니다. 차지철 실장이 두 쪽으로 갈라진 송판을 들고 대통령에게 달려갔을 만큼. 대통령이 오셔서 악수를 청했지요. 집사람에게 '웬 여자가 이래 힘이 세? 이마는 다치지 않았어?' 하시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경호원의 이름을 불러준 대통령

 

―그해 10월에 박 대통령이 서거했습니다. 청와대 경호처에 들어간 건 전두환 대통령 취임 이후였지요?

 

"박 대통령 때처럼 청와대 연무관에서 특공무술 시범을 보이자 바로 5급 경호공무원으로 채용하더군요. 더는 밥 굶고 살지 않아도 되니 집사람이 제일 좋아했지요. 직장생활은 난생 처음인 데다 바로 1년 전에 대통령이 측근에게 시해되는 사건이 있었던 터라 출입증을 달고 청와대에 들어설 때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다' 각오를 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과는 구면(舊面)이었겠습니다.

 

"박통 시절 606부대에서 뵌 분을 대통령으로 모시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죠. 딸 소영씨도 내 제자예요. 먼저 운동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해왔지요. '영애'라고 호칭했더니 대뜸 '그냥 소영이라고 부르세요' 하더군요. 아버지와 포옹도 스스럼없이 하고 내숭이라곤 없는 완전 미국식 처녀였어요."

 

―문민정부 김영삼 대통령은 어땠습니까.

 

"총소리가 나도 놀라지 말라고 경호실장이 미리 말씀 드렸는데도 시범 초반에 쥐었던 주먹을 시범이 끝날 때까지 펴지 못할 만큼 무서워하셨어요.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아내에게 무예를 배운 인사도 꽤 됩니다. 김무성, 정병국, 이병석 (국회)부의장까지.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 시범을 보고 나서 경호에 대한 인식을 바꾸셨지요. 청와대 오기 전엔 경호실을 축소하겠다고 벼르셨다는데, 우리 시범을 보고 달라지셨어요. 나중에 들으니 김대중 대통령이 격투기를 상당히 좋아했대요. 비서관 말로는 이희호 여사와 리모컨을 갖고 자주 다퉜다고 하더군요."

 

―어느 대통령을 가장 좋아합니까.

 

"다들 매력 있고 훌륭하시지요."

 

―그래도 인간적으로 가장 끌리는 대통령이 있을 듯한데요.

 

"글쎄, 말해도 되는 건지. 나는 전두환 대통령이 제일 멋졌어요. 사나이지요. 다른 대통령들과 달리 전 대통령은 경호원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을 불렀어요. 막내 재만씨를 나에게 보내 특공무술을 배우게도 했는데, 대통령 아들이라 부담스러워 살살 가르치면 '나를 대통령이 아니라 학부형으로 생각하고 스파르타식으로 교육해달라'고 부탁하셨죠."

 

―책에 보니 백담사에 은둔하던 전두환 대통령 내외를 찾아갔더군요.

 

"나는 무인이지 정치하는 사람이 아니니 상전에 대한 예의, 의리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눈이 키를 덮을 만큼 많이 왔는데 산길을 걸어올라 오는 우리 부부를 보고 경호원들이 깜짝 놀라더군요. 10분만 뵙고 갈 테니 상부에는 보고하지 말아달라 부탁했지요. '저 빨간 다라이(고무통)가 내 목욕통이오' 하고 웃는 대통령을 보면서 권력 무상을 절감했습니다."

 

―정권이 여러 번 교체되었는데도 20년 넘게 청와대 사범 자리를 지켰습니다.

 

"청와대 비표를 받고 처음 출근하던 날 집사람이 내게 부탁한 말이 있어요. 자기는 돈 같은 거 필요 없으니, 퇴직하는 날 이 비표를 멋지게 반납해달라고 하더군요. 온갖 청탁이 오가는 곳인 만큼 뒤통수가 부끄럽지 않게, 무도인답게 나와달라고 했지요. '전라도'라고 청와대 다른 무도 사범들이 따돌리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어요.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같은 전라도라 사부님은 좋겠다고 부러워하는 요원들도 있었지만 1%도 그분 도움받은 적 없습니다. 실력만이 정치 바람을 타지 않은 유일한 비결이었다고 생각해요."

 

◇둘 중 하나는 죽는다?

 

장수옥은 전북 김제 사람이다. 달리기는 언제나 1등이었고 철봉, 축구 실력도 뛰어났다. 초등학교 때 이미 교실 처마 밑에 달린 고드름을 발로 차서 떨어뜨리는 놀이를 했다는 그다. 중학 시절 서울역에 왔다가 야바위꾼들에게 돈 빼앗기고 두드려맞은 일 때문에 태권도와 합기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부농이었던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 집안이 거덜나는 바람에 대학을 포기하고 도장(道場)을 연 게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이미 "족기(足技)는 전라도 장수옥이 최고"라는 얘기를 들을 때였다. 진흙 속에 묻힌 원석을 다이아몬드로 수련시킨 주역이 김단화다. 장수옥의 촌티와 뚝심에 반한 그녀는 결혼 후 오로지 내조를 위해 도복을 벗는다. 전라도·경상도 커플에 기독교·불교 부부이기도 한 이들의 '격렬한' 사랑 이야기다.

 

 

1979년 6월 청와대 연무관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특공무술 시범을 보인 뒤 악수하는 장수옥. 그 옆에 아내 김단화가 서 있다. / 대한특공무술협회 제공

 

―두 분을 보고 브래드 피트와 앤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영화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의 한국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누가 더 셉니까?

 

"싸우면 둘 중 하나는 죽겠지요(웃음). 신혼 때 말다툼을 하다 육탄전으로 번졌는데, 어머니가 방문을 열더니 혀를 차세요. '너 설마 쟤를 못 이기는 거냐?' 하시면서."

 

―결혼 반대가 극심했다면서요?

 

"인사드린다고 집사람이 서울에서 왔어요. 어머니께 절을 하는데, 이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부처님께 올리는 오체투지, 그러니까 양손으로 연꽃 모양을 만드는 절을 하고 만 겁니다.

'야가 불교 아니여?' 하고 놀라자빠진 어머니가 그날로 금식기도에 들어갔지요. 결혼하고서도 곡절이 많았어요. 핫팬츠를 입고 마을을 누비니 이웃에서 흉을 보고, 참다못한 아버지가 '니 각시 옷 좀 입혀라' 하시고요(웃음). 그래도 집사람이 늘 고마워요. 어머니 위해 개종까지 하고, 시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딸처럼 따라주었지요."

 

―김단화의 내공(內功)이 탐나 결혼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아내의 무술은 내겐 경외의 세계였어요. 내 무술이 스피드와 유연성, 순발력을 바탕으로 한 외공(外功)이라면, 단전호흡을 바탕으로 한 아내의 무술은 집중을 통한 파괴력이 핵심이었죠. 아내에게 호흡법을 배웠고, 동작 한 가지에 호흡 한 번이 아니라 호흡 한 번에 50가지 동작을 할 수 있는 특공무술이 탄생한 겁니다."

 

아내와 함께 있으면 두려울 게 없겠다고 하자 김단화씨가 집에 도둑 든 얘기를 했다.

"'여보, 도둑이야' 하니까 코 골던 이이가 뭐라고 한 줄 알아요? '잡어.'"

 

자녀 교육은 어떻게 시켰느냐는 질문에 다시 김씨가 나섰다.

"아들이 친구들한테 만날 듣는 질문이 '너네 엄마는 박치기하고 아빠는 하늘을 난다던데 거기서 어떻게 사냐?'였대요. 하지만 아주 평범한 가정이었죠. 사랑으로 키웠어요. 딱 한 번 아들놈 등짝을 때린 적이 있는데 애가 자지러지길래 윗옷을 들춰보니 손바닥 자국이 벌겋게 나 있어 기겁했지요. 이후로는 절대 안 때렸어요."

찰떡궁합인 부부는 시련도 함께 이겨냈다.

 

―결혼 초 생활이 궁핍해 자살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는 뭡니까.

 

"서울 올라와 도장을 열었는데 잘 안 됐어요. 독일에 사범으로 보내주겠다는 사람에게 사기까지 당해서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었지요. '차라리 죽자'하고 칼을 집어들었는데 엄마 젖을 빨며 방긋방긋 웃는 딸아이를 보니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죽을 각오로 살면 어떻게든 살아지겠지'하고 산 게 지금까지입니다."

 

―요즘도 경제적 어려움으로 절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낭떠러지 끝이라도 부부가 이 악물고 가정을 지킨다면 이겨낼 수 있어요. 영원한 시련은 없지요. 우리만 해도 죽자고 결심한 그 이듬해에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지요."

 

◇눈이 불꽃처럼 살아 있어야

 

―무술 하는 남자도 집안일을 거듭니까?

 

"청와대 있을 때 어느 방송사에서 내 일과를 취재한 적이 있어요. 저녁밥 먹고 내가 직접 설거지하는 장면이 나갔더니 제자들 집집마다 부부싸움이 났답니다. 나는 경호원이 제대로 일하려면 가정이 화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집안이 어수선한데 대통령을 올바른 정신으로 지킬 수 있습니까?"

 

―부인이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고요?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요. 하하하!"

 

―무술 하는 남자도 눈물을 흘립니까?

 

"가난을 당해낼 재간이 있어야지요. 한번은 잘 사는 친구가 술을 사주는데 쌀 사게 돈 달라 소리는 못하겠어서 체육관 매트 좀 갈게 도와달라고 했더니 친구 간에 돈거래는 안 하는 거라며 딱 자르더군요. 미안했는지 택시 타고 가라며 10만원을 줘요. 택시에 올라탔다가 바로 내려서는 그 돈으로 쌀을 사서 집에 들어가는데 눈물이 쏟아지데요. 아웅산 테러 때 아끼던 제자 요원을 잃었을 때에도 많이 울었습니다. 대통령을 위해 죽는 것이 경호원의 숙명이긴 해도 너무 꽃 같은 나이라…."

 

―주먹과 무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주먹은 깡다구죠. 생명이 짧아요. 김태촌을 보세요. 무도는 호흡이고, 인격을 쌓는 길입니다."

 

―중국 무술영화를 보면 술 태백이 사부가 한손에 술병을 들고도 적들을 물리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술도 잘하십니까.

 

"아버지가 지독한 술꾼이었던 탓에 술은 입에 대지 않습니다. 체격도 작은데 술에 취하기까지 하면 제자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요. 그래서 지도자는 외로운 겁니다(웃음)."

 

―새해 소망은 무엇입니까.

 

"중국 소림사에 버금가는 무술원을 한국에 만들고 싶어요. 충주시에서 지원할 의향이 있다고 해서 요즘 힘이 납니다. 또 하나는 '국민경호원'이 되는 거예요. 25년간 국민 세금으로 밥 먹고 살아온 제가 죽기 전 그 빚을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들과 함께 학교 폭력, 성폭력 등 모든 폭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조직을 만들어볼까 합니다."

 

―'필살기' 하나 가르쳐주시죠.

 

"싸움은 피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부득이 맞서야 할 상황이면 눈으로 먼저 제압하세요. 싸움이든 인생이든 눈이 불꽃처럼 살아 있어야 이길 수 있습니다."

 

 

/ 조선

 

 

 

 

[박정진의 무맥] “적을 필살하라” 특공무술

 

北 ‘격술’에 맞서기 위해 탄생
경호무술로는 세계 최강 자랑

 

무술은 필요할 때는 상대를 필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온갖 좋은 것을 다 들여놓고도 상대에게 필살된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물론 상대를 죽이지 않고 굴복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술에서 기 싸움을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것은 동물적 본능이다. 그래서 무술은 동물 되기이다. 필요하다면 무엇을 쓰지 못하랴 하고 나서는 것이 무술이다.

 

 

◇장수옥 총재의 발차기 모습. 워낙 빠르고 강력하여 발끝이 흐리게 보인다.

 

 

무술은 어디까지 진화하는가. 전통무술은 옛것의 진수를 알고 그것을 지키는 데 치중하는 것이라면, 창시 무술은 당대 최고의 술기(術技)를 통합하여 가장 훌륭한 무술을 창조함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물론 창조라는 것이 옛것을 바탕으로 온고지신하는 것이라는 데에 무술도 예외가 아니다. 현실적 결핍과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특공무술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적 현실에서 한국적 필요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124군 부대 정예요원 31명이 청와대를 급습하기 위해 침투한 사건이 있었다. 무장공비가 청와대 뒤편 세검정 고개와 평창동 일대에 난입한, 흔히 ‘1·21 사태’, ‘김신조(金新朝) 사건’으로 일반인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사건이다. 당시 김신조를 제외한 전원이 사살되었고, 김신조마저도 자살이 여의치 않아서 생포된 것일 뿐이었다.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급습하려고 한 것도 그렇지만 전원이 여의치 않을 때 자살한다는 것은 북한의 정신교육이 얼마나 강력하고 세뇌적이고, 비인간적인지를 목격하게 한 사건이다. 그들은 일종의 자살특공대였다.

그 사건 때문에 군과 경찰은 초비상사태에 들어갔고, 재무장·재훈련의 반성이 쏟아졌다. 곧바로 북한군의 비정규전에 대비한 예비군이 창설되었고 방어체제 전반에 일대 수정이 가해졌다. 한편 북한군의 무술 수준을 점검하기 위해 우리 군 무술 고단자들과 북한 출신 요원들 간에 대련이 벌어졌다. 북한의 무술은 ‘격술’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군 고단자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고 중국 무술 고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하면 북한의 격술이 적을 살상하는 데에서는 당시로서는 가장 진화된 세계 최고의 무술이었다. 태권도는 살상에는 취약했으며 겨우 합기도가 그나마 선방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합기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무술 개발이 절실했다.

여러 무술에 대한 시범과 대련이 606경호부대 산하에서 있었고, 그 가운데 채택된 것이 바로 해전(海田) 장수옥(張水玉) 선생의 ‘특공무술’이다. 청와대 소속의 606경호부대는 특공무술의 탄생지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 경호실의) 영원한 사부’로 통한다. 본래 합기도인이었던 그가 자신의 특기를 개발하고 여러 무술의 장점을 살려서 새롭게 만든 특공무술은 처음엔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줄여서 무문도(無門道)라고 하였던 것인데, 청와대 경호팀과 인연이 맺어지면서 특공무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드디어 1978년 11월 대통령 경호실 연무시범에서 ‘특공무술’ 명칭이 결정됐다. 이어 79년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시범을 보였고,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0·26 사태 등을 거쳐 다시 80년에는 전두환 대통령 앞에서 시범을 보이면서 정식으로 장 사범은 경호사범(공무원 4급을)이 되었고, 85년에는 ‘특공무술 교본’이 완성된다.

특공무술은 태권도에 이어 한국에서 탄생한, 재창조된 한국 오리지널의 무술이다. 장수옥 창시자는 “현재 지구상에서 경호무술로는 가장 진화된 형태의 무술이다. 그 까닭은 내공과 외공을 겸비한 무술이기 때문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61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특공무술을 선보이고 있는 특전여단 장병들.

 

 

그가 경호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태권도, 합기도, 유도, 검도가 4대 경호무술 종목이었다. 그런데 특공무술이 들어가면서 합기도가 없어져서 일부 반발도 있었지만 그는 오로지 실전에서 이기는 실력주의로 주위를 설득해갔다. 특공무술의 탄생에는 무술계에서는 철선녀(鐵扇女)로 통하는 미모의 아내 김단화(金丹和)가 크게 한몫했다. 장 사부는 그때까지만 해도 외공에 주력한 나머지 내공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내공을 위주로 하는 정신도법수련원, 후일 국선도 창시자 청산거사의 1대 제자였다. 철선녀라는 이름도 그가 지어준 이름이다.

그가 아내에게 크게 배운 것은 호흡법이었다. 호흡을 길게 하여야 공격시간을 늘릴 수 있고, 동시에 타격을 받더라도 크게 상해를 입지 않는다. 그 호흡법은 바로 단전호흡이었다. 단전에 호흡의 중심을 두고, 그 중심을 잃지 않고 리듬에 따라 공격하면 그러지 않을 때보다 몇 배의 연결공격과 파괴력이 생겼다.

다시 말하면 특공무술은 그의 외공과 아내의 내공이 만나서 이룩한 무술이다. 그를 경호무술 사부로 만드는 데는 아내의 공이 컸다. 그래서 결국 성공한 남자의 뒤에는 항상 훌륭한 여자가 있게 마련이다.

태권도가 공수도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재창조된 무술이라면, 특공무술은 합기도를 바탕으로 재탄생한 무술이다. 특공무술의 핵심은 방어와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연속성이다. 흔히 공격이 방어라고 하지만 그것보다 한 수 위인 공격과 방어의 동시성은 바로 절권도의 이소룡도 추구한 무술의 최고 경지이다. 중국에 절권도가 있다면 한국에 특공무술이 있는 셈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동시성의 세계’, ‘세계는 생성되는 하나’임을 무술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이소룡이 죽은 뒤 홍콩의 영화제작자가 수소문하여 장 사범에게 와서 영화배우 테스트(1978년 6월)를 한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다. 하마터면 영화배우가 될 뻔한 그를 잡은 것은 예상치 못했던 606부대로부터의 연락 때문이었다.

“호흡의 장단이 중요합니다. 호흡의 장단을 조절하면 열 번 숨을 쉬어야 할 것을 다섯 번으로 줄일 수 있고, 그만큼 공격과 방어를 숨을 쉬지 않고 계속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상대방과의 경쟁에서 우선 호흡에서 이기고, 호흡에서 이기면 기가 살아나고, 기가 살아나면 몸이 유연해지고, 동작의 여유와 기량을 잘 발휘할 수 있게 되고, 궁극적으로 상대를 제압하게 됩니다. 또 한 가지, 힘의 근원이 다릅니다. 흔히 외공은 주먹지르기를 할 경우 어깨와 팔의 근육을 단련해 그 힘으로 가격을 합니다. 그러나 내공이 가미된 특공무술은 주먹지르기를 할 때도 손끝에 힘을 주지 않고, 팔을 뻗는 순간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의 장기인 평수법(平手法)은 일종의 장풍(掌風)으로 손바닥으로 상대방의 급소나 혈을 타격하는 것인데 그저 피가 나거나 찢어지는 외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통증을 느끼게 하는 깊이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의 다른 특기인 족기술(足技術), 즉 고축차기는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공중으로 뛰어올라 3m70cm 위에 있는 송판을 격파하는 기술로 지금까지 그를 흉내조차 내는 후배가 없다.

특공무술은 합기도 5할, 태권도 2할∼3할, 그리고 그가 새로 개발한 내공과 외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여러 무술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새로운 무술체계로 거듭났다. 그래서 특공무술이다. 특공무술의 수련과정을 보면 유급과정이 있고, 그다음 초급(1단), 중급(2단), 고급(3단)과정이 있고, 가장 높은 곳에 지도자과정(5∼6단), 교수연구과정(6∼7단)이 있다.

유급과정에선 기본자세, 기본형, 손목빼기, 기본꺾기, 손공격, 발공격, 손발공격, 기본낙법, 기초체력 등이 공통으로 있다. 초급과정에 들어가면 생활무술을 할 것인가, 경호무술을 할 것인가, 국방무술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경호무술 가운데서도 보통 경호무술을 할 것인가, 경찰무술을 할 것인가, 경비무술을 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에 따라 무술의 내용도 달라진다. 생활무술을 하는 사람은 유단기본형, 손목수(안과 바깥), 발방어를 배우고, 경호·경찰·경비무술은 경호형과 단본형, 응용꺾기, 몽둥이 방어, 태클 기술 등을 배운다. 국방무술은 특공형, 대결형, 선수공격 등을 배운다. 중급, 고급으로 갈수록 세분화된다.

특공무술은 현재 유단자가 약 7만명, 전국 130여개 도장(해외 3개 포함) 회원은 50만∼60만명에 이른다. 여성 유단자가 30%에 이른다. 전국 70여개 대학 경호학과에서 특공무술을 가르치고 있다. 태권도 다음의 막강한 세력과 실력을 갖춘 자생무술이다. 특공무술은 청와대 경호부대는 물론 육군의 특전사 예하부대에서 배우고 있으며, 최근 우리 군의 무술 강화를 위해 태권도와 함께 군 전체에 일반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경찰도 특공무술을 배우는 예가 많아졌다. 지난 10월 1일, 61주년 ‘국군의 날’에는 특전사 군인 400여명과 어린이 특공무술 수련생 30여명이 함께 계룡대에서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머지않아 태권도와 함께 우리 군의 무술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

서양의 경호무술은 주로 ‘기계경호’이기 때문에 정신적 구심점이 없다. 그래서 경호무술을 관통하는 정신이 없다. 이에 비해 특공무술은 무술의 창시자가 있고, 그 철학이 굳건하기 때문에 정신적 중심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투철하고 청렴한 국가관과 중도·중립의 정신이다. 장 사범은 그동안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까지 모두 다섯명의 대통령을 경호했다. 이들은 모두 정치적 노선과 철학이 달랐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철통 같은 경호의 대상이 되는 대통령일 뿐이었다. 그는 좌우사상과 지역 당쟁에는 언제나 초연하였다.

 

◇특공무술을 익히고 있는 엘리트도장의 초등학교 아동들.

 

 

그가 1989년 초 아내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에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할 때 문안을 드린 적이 있다. 당시 현직 공무원 신분으로 그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치적으로 동조하는 것이라면 현직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다. 경우에 따라 백담사에 도착하기도 전에 저지당할 수도 있었고, 정치적 반대파라면 백담사에서 거절하였을 것이다. 그는 담담하게 전(全) 대통령을 찾았다.

다행히 경호요원들이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기에 제지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보는 이에 따라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고 하마터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그는 전라도 익산 출신이고, 아내는 경상도 대구 출신이다.

특공무술의 특징은 실전성, 심신수련성, 호국성을 들 수 있다. 무술의 체득방법은 심득(心得), 행득(行得), 언득(言得), 서득(書得), 고득(苦得)의 5가지 방법이 있다. 특공무술의 철학은 ‘공격과 방어의 동시성’을 통해 최고의 무술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훌륭한 무술이라면 찾아가서 배울 자세가 되어 있다. 전통이니 고수니 하면서 목에 힘주고, 서로 제 잘났다고 떠드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특공무술은 공공연히 기존 무술의 종합, 재창조라는 것을 선언한다. 언제나 결국 실전에서 승리하는 것이 무림 세계가 아닌가. 세계 최고의 무술을 지향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철학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중도, 중립, 중용의 정신이 필요하다.

그는 요즘도 스승으로서 갖추어야 할 세 가지를 실천하고 있다.

“배가 고픈지 안 고픈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돈이 있는지 없는지, 제자들이나 주위에서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사부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그를 바라보면 역시 무술계 거목임을 알 수 있다. 간혹 제자들 중에 그가 권력에 가까이 있을 때에 특공무술을 키울 이권이나 재력을 얻을 기회가 있었을 텐데 라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부류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가 은퇴 후 사회에 나와서 뒤늦게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구속이라도 당하면 바로 특공무술은 문을 닫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그는 청와대에서 25년간 경호원들의 사부로 있었지만 자신에게 엄격하였고, 그동안 가난과 어려움에 시달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날 주위의 도움을 일절 받지 않고 검소하게나마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사전에 이를 차단한 아내가 지금 생각하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특공무술의 발전을 위해서 후계구도를 정하고 여러 준비와 고심을 하던 차에 다행히 아들 장은석(張恩碩)이 자신의 일을 걷고 뒤늦게나마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특공무술의 세계화에 앞장서서 여간 든든한 게 아니란다. 아들은 1988년 7월에 정식으로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특공무술협회의 전무이사를 맡고 있으며 경호전문 박사과정(국제대학)을 밟고 있다.

장은석 전무가 특공무술협회 산하 ‘엘리트도장’의 운영에 관계하고부터 어린이 수련생들이 부쩍 늘었다. 고지식한 장 사범과 달리 아들은 훈련과 음악을 병행하는 운영의 묘를 선택했던 것이다.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엄마와 학부형이 함께 춤추고 노래하게 한 것이 주효하였다. 이를 못마땅하다고 생각한 장 사범이 아들에게 제지하였지만 물러서고 말았다. 아들의 말은 우선 도장에 학생들을 오게 하여야 무술을 가르치든가 말든가 할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동과 학부형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운영이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렇다. 얼마나 철두철미한가를 짐작케 하는 말이다.

“경호는 1%만 미스가 나도 실패이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2009.12. / 세계일보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