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11. 16:17ㆍ詩,
편 지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자화상(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쉽게 씌어진 시(詩)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學費) 봉투(封套)를 받아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줄에 줄이자
―만이십사년일개월(滿二十四年一個月)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프랑시스 잠',‘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서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또 다른 고향
고향(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宇宙)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에 가자.
간(肝)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병원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
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
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
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 가지 우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
을 들여다보려면 눈섭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보
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
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
의 얼굴은 어린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고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걸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오줌싸개지도
빨래줄에 걸어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간 아빠 계신
만주땅 지돈가?
못 자는 밤
하나,둘,셋,넷
.................
밤은
많기도 하다.
윤동주 尹東柱 (1917. 12. 30 - 1945. 2. 16)
북간도(北間島) 출생.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도일,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 재학 중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 사상범으로 일경에 피체, 1944년 6월 2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연길(延吉)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고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일하기 앞서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그의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된 윤동주는 일약 일제강점기 말의 저항시인으로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씌어진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등 어느 한 편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울분과 자책, 그리고 봄(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연세대학교 캠퍼스와 간도 용정중학 교정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으며, 1995년에는
일본의 도시샤대학에도 대표작 《서시》를 친필과 함께 일본어로 번역, 기록한 시비가 세워졌다.
북간도 독립투사들의 삶과 독립운동
윤동주 장례식 ...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살에 순국한 윤동주 시인의 장례식(1945년 3월 6일 용정 자택).
은진학교 봄 소풍...
대포산은 산의 모양새가 대포와 닮아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일제는 대포산의 ‘대포’가 일본 영사관을 향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 산을 훼손했다.(1939년 5월 6일)
명동학교 시절의 나운규 ...
영화배우이자 감독이었던 그는 영화 '아리랑'과 '풍운아'를 만들어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명신여학교 음악반 ...
1930년대 명신학교 음악반 학생들의 연주 모습.
숭실학교 시절의 윤동주와 문익환 ...
1930년대 숭실학교 시절 교복을 입은 윤동주(뒷줄 맨 오른쪽)와 문익환(뒷줄 가운데).
김약연과 명동교회 교인들 ...
1910년대 명동교회 모습. 명동서숙을 설립한 김약연이 1909년에 세웠다.
명동학교 졸업식 ...
1931년에 졸업한 명동학교 소학부 제17회 졸업생(1931년 3월 21일).
명신여학교 운동회 ...
1940년대 명신여학교 학생들의 운동회. 뒤편에 보이는 건물이 현대식 교사(校舍)다.
거룻배를 탄 구례선 목사 일행 ...
1910년대 선교활동을 위해 거룻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는 구례선 목사 부부.
규암 김약연의 장례
명동촌의 주역인 김약연의 장례식. 기독교식으로 치러지는 모습이 눈에 띈다.
(1942년 10월)
오층대건물 ...
받은 중국 관원이 발포해 사상자가 발생한 오층대 건물의 옛 모습이다.
명동학교 동문회 ...
해방 뒤 명동촌 출신 인사들이 동국대학교에 모였다.
정재면, 문재린, 문익환, 김기섭, 윤영춘, 윤영규 등이 보인다.
윤동주 생가 기와 ...
윤동주 시인 생가의 기와. 태극문양이 선명하게 보인다.(1920년대)
*연희전문(연세대학교의 전신) 졸업당시 모습(1941년)
*1941년 11월 20일에 쓴 친필 원고지(윤인석 씨 소장)
서시(序詩) - 윤동주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나는 괴로와했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의 친구(정병욱 교수)에 의해 숨겨져 오다가 정음사에서 1948에 출간 -
|
*윤동주가 재학했던 일본 쿄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대학 교정의 시비 <序詩>
序詩
*윤동주 시비 뒷면 (同志社 大學 교정 /2007. 6. 27) * 위 윤동주 시비의 옆 모습 *윤동주의 詩碑(좌측)가 있는 곳에 윤동주의 선배 정지용의 詩碑(우측)가 2005년 10월 30일에 충북 옥천군과 정지용기념사업회에 의하여 건립 되었다.
영문과에서 修學 하였다. *윤동주의 詩碑 (序詩가 한글과 일본어 번역이 음각되어 있다 *이부키 고(伊吹郷 )라는 자가 일본어로 번역한 윤동주의 서시: 왜곡된 번역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고 있지만, 현재 일본에서는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다. (윤동주의 시비에도 '이부키 고'의 번역시가 각인되었음) * 도시샤 대학 기획홍보과에서 발행한 윤동주의 시비에 대한 안내 책자(2005년)
*위 안내 책자 뒷면 표지 ( 대학동기생들과 宇治川에 놀러 갔을때의 모습/1943) * 도시샤 대학의 교정(일본에서는 자전거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다 (2007. 6. 27 ) *도시샤 대학의 교문 (2007. 6. 27)
* 도시샤 대학의 교정(2007. 6. 27)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있어서 일까
* 天과 空의 개념의 차이는 무엇인가? <天と風と星と詩>과 <空と風と星と詩>... 우리가 바라보는 단지 푸른 하늘(空/소라)일까, 아니면 天/뎬 일까?
* "모든 죽어가는 것(すべての死にゆくもの)을 사랑해야지"를 왜? '모든 살아 있는 것(生きとし生けるもの)을 사랑해야지' 라고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문장으로 번역 하였을까? |
일본 제국주의가 그 마지막 기세를 떨치던 어두운 시절, 당시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에 다니던 청년 시인 윤동주가 차디찬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싸늘하게 죽어간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민족의 아픔으로 남아있다.
다행히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그의 친구(정병욱 교수)의
정성으로 마루 밑에 숨겨져 있다가 이후 출간되지 않았다면, 이 아름다운
민족시인 윤동주의 이름 석자는 세월 속에 그냥 묻혀 잊혀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 그의 시 가운데서도 특별히 '서시(序詩)'가 한국인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가 다녔던 모교, 연세대와 일본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캠퍼스 내에 시비로 각인돼 영원히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음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다.
▲ 교토조형예술대학의 새로운 시비 |
ⓒ2006 홍이표 |
게다가 최근에는 윤동주가 마지막까지 살던 아파트가 있던 자리(현 교토조형예술대)에도 그의 시비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한국일보>, 6월 27일자). 최근 나는 처가집이 있는 고베를 방문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그 소식을 접하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도시샤 대학에 이미 세워졌고, 이번에 또 다시 세워진 시비에는 터무니없는 오역이 연속해서 새겨졌음을 발견하니 그 기쁨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일본에 세워진 두 개의 시비는 윤동주와 그의 시를 오히려 왜곡하는 결과를 빚고 만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문제의 주인공은 1984년 윤동주의 번역 시집을 출간한 이부키 고(伊吹 郷)씨이다.
그가 번역한 윤동주의 '서시'는 현재 일본 고교 국어교과서인 <신편 현대문>에
실린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에세이 '윤동주'에 전문 번역본이 인용돼 있다.
또한 윤동주가 다닌 도시샤 대학과 최근의 교토조형예술대학에도 그 시가
새겨져 있으며, 최근 소설가 공지영씨와 일본인 작가 츠지 히토나리가 함께
쓴 한일소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도 그의 번역이 원용되었음을 확인했다.
이부키씨의 윤동주 시 번역은 지금 거의 다 일본어역의
정본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序詩
死ぬ日まで空を仰ぎ
一点の恥辱なきことを、
葉あいにそよぐ風にも
わたしは心痛んだ。
星をうたう心で
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そしてわたしに?えられた道を
歩みゆ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吹き晒らされる。
(이부키 고, 伊吹郷 訳)
이부키씨의 '서시' 번역... 의도적으로 윤색된 오역
▲ 1996년 2월 도시샤 대학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지기 직전 일본 기독교 출판사에서는 <天と風と星と詩>라는 윤동주 시집과 평전을 출간했다. 이부키씨가 번역한 시집의 제목은 <空と風と星と詩>라고 되어 있다. | |
ⓒ2006 일본 기독교 출판국 |
하지만 이부키씨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신념이 깊게 배어있는 윤동주 시의 양 축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심지어는 왜곡하기까지 하였다.
'서시'의 첫 줄부터 살펴보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에서 윤동주 시인은 물리적 개념의 하늘(Sky)을 막연히 바라봤던 것이 아니다. 거기서 '하늘'은 그의 맘 속에 뿌리내린 깊은 신앙의 고향을 의미한다.
이부키씨가 이것을 '소라(空)'라고 번역했으니 마땅히 일본의 기독교회가 공통적으로 쓰고 있는 주기도문의 하늘, '덴(天)'으로 표현해야 한다. 또한 영어의 경우에도 '스카이(Sky)'가 아닌 '헤븐(Heaven)'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 한글에서는 '하늘'에다 '님'을 붙여 '하늘님' 혹은 '하느님'으로 자연스럽게 사용해 왔다.
그렇듯 우리 말 '하늘'은 그 자체로서 깊은 종교성을 함축하고 있지만, 일본어의 경우, '소라(空)'에 님(사마, 樣)을 붙이면 '소라사마(空樣)'인데 그런 말은 없어서 매우 어색해진다. 따라서 일본 교회에서는 주기도문을 외울 때 소라(空) 대신 "'하늘(天)'에 계시는"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윤동주는 어떤 사람인가? 한국의 갈릴리 땅 같았던 만주 용정에 나고 자란 그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이 조화된 풍토 속에서 성장했다. 윤동주의 생가에 가면 직접 구운 기왓장 하나에도 십자가와 석삼자(삼위일체), 그리고 태극문양을 함께 새겨 넣었다.
기독교 신앙과 민족사랑은 그의 뿌리였으며 그 중심에는 공허한 하늘이 아닌 신앙으로서의 하늘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소라(空)' 대신 '덴(天)'을 써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오역은 더욱 치명적이다.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시인의 다짐을 "
한 점 치욕(恥辱)이 없기를"이라고 옮긴 것이다. 여기서 윤동주 시의 신앙적,
민족적 지조와 양심을 완전히 훼손하고 있다.
이국(異國) 혹은, 이민족(異民族)으로 인해 어떤 환난이 닥쳐오더라도 결코
하나님과 민족의 양심 앞에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겠다는 이 다짐이,
마치 압제자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일이 안 생기게 해달라고 빌기라도
하듯이 번역한 것이다.
이로써 윤동주 시인의 서시는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무사안일을 소망하는
구차한 시처럼 바뀌고 말았다. 만약 시인이 그러한 옹졸한 자세로 살았다면,
27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한 그의 마지막 삶의 행적은 쉽게 설명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윤동주 시인은 "모든 죽어가는 것(すべての死にゆくもの)을
사랑해야지"라며 읊고 있다. 그는 점점 더 가혹해지는 민족과 세계민중의
기막힌 수난을 자신의 실존적인 아픔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대목도 이부키씨의 번역에는 문제가 많다. 그는 이 구절을 '
모든 살아 있는 것(生きとし生けるもの)을 사랑해야지' 라며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문장으로 바꾸어 버렸다.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문학연구자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교수도 '
서시'의 이부키 번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고 한다.
"윤동주가 서시를 쓴 당시 일본 군국주의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이 죽어갔고,
조선인의 말과 민족 옷, 생활풍습, 이름 등 민족문화의 모든 것이 '
죽어가는' 시대였다. 이렇게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외친
그는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을 당연히 심히 증오했을 것이다.
이부키의 번역은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도 똑같이 사랑한다는 말이
돼버리지 않을까?"(<한겨레신문> 6월 16일자)
또 연세대의 정현기 교수는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의 의미
차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면서 그 표현을 의도적으로 구겨놓은 일본인
문인의 숨겨진 의도가 너무 천해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역사학자들은 제3자에 의해 윤색된 1차 사료(일기, 편지 등)는 신뢰하지
않으며 연구에 가급적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렇듯 의도적으로 윤색된
오역은 외면 받는 역사 사료와 그 무엇이 다를까?
▲ 윤동주의 장례식 광경 일제의 고문에 의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윤동주 시인의 장례식 광경(1945년 3월 6일 용정 자택) |
ⓒ2006 독립기념관 |
'서시'의 잘못된 번역... 오해와 대립만 심화시켜
최근 재일교포학자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는 "꺼림칙한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한 일본인 문학가의 개인적 정서로 인해 윤동주의 시도
가능한 한 일본을 향한 고발로서가 아니라 매우 일반적인 '실존적
사랑의 표백(표출)'으로 읽고 싶어 하는 것이다. 번역이라는 행위가
타자간의 상호이해를 증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오해와 대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는 실례가 바로 이부키의 번역에 있다"(<한겨레신문>
7월 14일자 '모어'라는 감옥)고 지적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새롭게 세워진 윤동주 시비 위의 이부키 역 '서시'들 또한
계속해서 오해의 또 다른 실타래로 이어져 갈까봐 걱정하게 된다.
이 문제의 한가운데는 윤동주의 '저항시인으로서의 면모'와 '보편적이면서도
실존적인 사랑'이라는 두 시각이 충돌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윤동주의 서시는 이미 기독교 신앙이라는 보편적 가치와 민족에 대한
애환이라는 특수한 가치가 동시에 내재되어 융합된 역설적 결과물이다.
따라서 어느 한 쪽만 강조할 수도, 누락시킬 수도 없는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윤동주 시의 원문이 왜곡됐는지의 여부인데, 심각한
오역이 일본에서 정본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현실은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그렇듯 윤동주의 시를 바로 옮겨 쓰기 위해서는 그의 시 세계의 두 가지
체험과 가치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즉 식민지 수난의 민족 일원으로서의
실존적인 고통 체험과 거기에 저항할 수 있도록 힘을 제공하고 결단할 수 있게
뒷받침해주었던 기독교 신앙의 체험이다.
물론 윤동주의 기독교 신앙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며
그 폭을 확대시키고 싶은 마음도 생길 수 있겠으나, 한 일본인 문인의 옹졸한
의도는 시인 윤동주의 신앙과 정신세계를 적잖이 왜곡시키고, 교묘한
은폐의 의도로 얼룩진 윤동주의 '서시'를 일본인들에게 전파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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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시비가 새롭게 세워진 곳은 시인의 도시샤 대학 유학시절 자취방이었던 다케다(武田) 아파트가 있던 곳으로, 창작의 열정을 꽃피웠던 마지막 처소였다. 시인은 이곳에서 한글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의 굴레가 씌워져 1943년 10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5년 2월 알 수 없는 이유로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옥사했다.
당시 함께 체포돼 역시 옥사한 시인의 고종 사촌 송몽규를 면회한 사람들은 두 사람이 매일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았다고 증언한 것으로 밝힌 바 있어 일제의 악랄한 생체실험 희생자라는 설도 있다.
그가 마지막 삶을 살았던 일본 교토의 한 변두리에 그를 기념하는 시비가 또다시 세워진다는 것은 정말 반갑고 기쁜 일이다. 그래서 나도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잰걸음으로 그곳을 향했다. 하지만 시비를 지켜보던 중, "윤동주가 점점 상업화 되어가는 것 같다"며 무심코 내뱉은 아내 미나꼬의 한 마디는 내 마음을 강하게 두드렸다.
윤동주는 어느새 교토지역의 관광자원으로 인식되고, 도시샤, 교토조형예술대학 등의 학교 홍보용 소재가 된 듯한 느낌이다. 최근에는 인근 리츠메이칸 대학의 교수도 새로운 시비 건립 계획을 발표해 그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는 윤동주 시인의 삶과 신앙, 그리고 그의 시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이 전제되었다 기 보다는 무조건 시비만 세우고 보자는 식의 성급한
도구적 논리가 앞선 것 같다.
이미 1995년, 구라타 마사히코, 한석희 선생 등, 일본 기독교 문인들이
뜻을 모아 <天と風と星と詩>라는 시집을 새롭게 펴내어 이부키씨의 시집
<空と風と星と詩>에 반박한 바 있다.
위에서 언급한 오역들이 모두 고쳐져 새롭게 세상에 나온 것이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부키씨의 번역이 새 시비 위에 버젓이 새겨져 있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씁쓸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序詩
死ぬ日まで天を仰ぎ
一点の恥もないことを
葉群れにそよぐ風にも
私は心を痛めた。
星をうたう心で
すべての死んでいくものを愛さねば
そして私に?えられた道を
歩んでい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こすられる。
(일본 기독교 출판국. 日本キリスト敎出版局)
나는 교토 변두리에 세워진 새로운 시비 앞에서, 60여 년 전 조국의 하늘을
그리워했을 윤동주 시인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세워진
시비 위에 그의 마지막 유작 <쉽게 씌여진 시(詩)>가 새겨졌어야 한다는
깊은 아쉬움을 지금까지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쉽게 씌어진 詩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握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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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엔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몰랐죠"
60여년의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많이 잊힌 상태지만, 일본제국주의의 압정은 간교하고 잔혹했다. 모국어(한글)로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급기야 죽음까지 당한 윤동주 시인. 지난 2월 16일이 그의 62주기다. 그는 정확하게 27년 2개월 동안 살았다. 그것도 죽기 2년 동안 감옥에 갇혔으니,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윤동주의 시는 전부 25살 이전에 쓰인 시들이다. 그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고, 그가 쓴 <서시(序詩)>는 가장 애송하는 시다. 남의 나라 땅 북간도에서 태어난 윤동주가 2살 되던 해(1919년), 일제에 항거하는 3·1만세운동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북간도에서도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윤동주의 형제 3남1녀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윤혜원(84)씨가 20여 년 동안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다. 3·1만세운동 88주년을 맞아, 여동생의 증언을 윤동주의 생애를 중심으로 3회에 걸쳐 들어본다. <편집자 주> |
그렇다. 시인은 모국어로 생각하고, 모국어로 시를 쓴다. 모국어와 함께 태어나서 한 세상을 살다가 죽는다. 시인에게 모국어는 '또 하나의 목숨'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모국어(한글)로 시를 쓰면 죄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죄로 감옥에 가고, 급기야 죽음까지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다. 일본 유학 중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2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옥사한 윤동주 시인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지난주 2월 16일이 그의 62주기였다. 죽은 다음에 시인으로 불린 윤동주 1945년 2월, 조국의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조선 출신의 한 젊은이가 일본 후쿠오카 감옥의 차디찬 마룻바닥에서 뜻 모를 외마디소리를 지른 후에 숨을 거두었다. 윤동주 시인이었다. 정확하게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였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늙지 않는 '청년 시인' 윤동주로 한국인의 가슴에 또렷이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가 생존할 당시엔 아무도 그를 시인이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입을 꼭 다문 고등학생 교복차림으로, 학사모를 쓴 대학생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윤동주가 시인의 호칭을 얻은 것은 옥사하여 무덤에 묻히는 순간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살아생전에 시인으로 등단한 적이 없는 그의 묘비에 '시인 윤동주지묘(詩人 尹東柱之墓)'라고 새겨진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 윤하현(1875-1948)이 "내 손자, 동주의 일생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의 삶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그런 묘비를 만든 것이다. 이렇듯 윤동주 시인의 갑작스런 죽음과 비극적인 생애는 그의 고고한 시편들과 함께 윤동주를 순교자적인 이미지로 깊게 각인시켰다. 그가 시인으로 데뷔한 일도 없고 시집 한 권 남기지 않았지만 한국현대시 100년을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명이 됐다. 또한 그의 시비가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 세워질 정도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시인이 됐다. 윤동주 시인이 시집을 출간하려고 시도했던 적은 있다. 본격적인 유학생활이었던 연희전문 4년을 졸업한 윤동주는 졸업 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묶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내려 했다. 그러나 은사인 이양하 교수 등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말하자 자진해서 시집출간을 포기했다. 대신 원고지에 펜으로 써서 3부를 묶는 걸로 아쉬움을 달랬다. 바로 그 시 묶음의 서문 격으로 쓴 시가 오늘날 대한민국 최고의 애송시가 된 <서시(序詩)>다.
스치는 바람 한 줄기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 그의 순결한 이미지가 그가 죽은 지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유지될 수 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몇 가지 있다. 그 첫 번째가 일본경찰에 체포될 당시까지 세상사에 물들지 않은 학생신분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다 윤동주 시인의 순절(殉節)한 이미지를 오랫동안 명토 박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유일한 혈육으로 남아있는 여동생 윤혜원(84, 시드니우리교회 권사)씨한테 있다. 북간도 룽징(龍井)에서 짧은 기간 초등학교 교사를 역임했던 윤혜원씨는 1948년 12월, 해방공간의 혼란스런 시기에 북간도에서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있던 윤동주 시인의 원고와 사진을 가져온 장본인이다. 거기엔 윤동주 시인의 초기와 중기의 작품들이 대부분 포함되고 있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시 원고를 가져온 윤혜원씨의 노력은 윤동주의 시세계가 더욱 풍성해지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주오빠 방의 책꽂이에 꽂혀있던 대학노트 3권을 아버지의 권유로 가져왔는데, 그 당시엔 그 노트에 담긴 시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몰랐다"고 윤씨는 회상한다. 그 대학노트에 담긴 윤동주의 걸작들이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1948년 초간본 31편에 들어있지 않은 시편들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 116편이 게재되어있는 증보판의 시편들 중 절반 이상이 윤혜원씨의 품에 안겨 월남했던 것이다. 이렇듯 큰일을 한 윤혜원씨는 그동안 언론과의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피하면서 한평생을 살았다. "동주오빠는 나의 오빠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를 사랑하고 그의 꼿꼿한 정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형님이요 오빠이기 때문에 공연한 말들로 그의 '티 없는 초상'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게 일관된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윤혜원씨는 동갑내기남편 오형범(84.시드니우리교회 장로)씨와 함께 서울에서 부산-필리핀-호주 등으로 계속 남하했다. 그들이 피했던 대상은 언론뿐만 아니라 수많은 윤동주 연구가들도 포함된다. 1986년, 시드니에 정착해서 21년째 살고 있는 윤씨는 호주에서조차 은둔생활을 계속했다. 침통한 표정의 윤동주 "그 분이 글쎄..."
나중에 할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인데,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서 젖이 부족하자 같은 해에 출생한 동주 오빠와 문익환 오빠가 문익환 오빠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젖을 함께 먹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나중에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동주오빠는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늦은 밤까지 등사용지에다 글을 써서 등사를 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오빠의 손가락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 이건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얘기인데, 동주오빠는 11살 때부터 <아이생활>이라는 어린이 잡지를 서울로부터 정기구독 했으며 명동소학교에서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학교잡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빠의 단짝이었던 문익환 오빠는 광명학교 시절 명동교회의 유년주일학교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 당시 유년주일학교 학생이어서 문익환 오빠의 지도로 성경이야기도 듣고 찬송가도 배웠다. 또한 오빠가 아주 쓸쓸한 표정을 짓던 때가 기억난다. 오빠의 방에는 책이 상당히 많이 꽂혀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광수의 소설 <무정>을 재미있게 읽은 내가 그분의 소식을 물어본 적이 있다.. 오빠가 갑자기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분이 글쎄..."하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2006년 10월 어느 날, 기자는 윤혜원씨의 남편 오형범씨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가 "윤동주 시인의 최후의 사진이 공개됐다. 한국에서 발간되는 <현대문학> 9월호에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 재학시절에 찍은 윤동주 사진과 사진설명을 쓴 일본여성의 기고문이 함께 실렸다"고 전해주었다. 사진의 배경이 되는 우지강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오형범씨와 함께 기사를 읽어보니, 우지강의 아마가세 구름다리 앞에서 윤동주 시인이 도시샤대 영문과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었다.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윤혜원씨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랑이 오빠가 부른 마지막 노래일 것 같다. 그 후엔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었으니..."라며 윤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은 사진에 대해서 설명한 기타지마 마리코(83)의 글이다. '사진은 1943년 초여름, 교토 우지강의 아마가세 구름다리 위에서 윤동주와 함께 도시샤대학에 다니던 남학생 일곱 명과 여학생 두 명이 담긴 기념사진이다. 그 중에 수줍은 듯 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학생이 있다. 이 남학생이 한국에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윤동주 시인이다. 강변에서 식사를 한 후 바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노래 한 곡 불러주지 않겠어?'라는 급우의 부탁에 윤동주는 '아리랑'을 불렀다.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목소리가 강물 따라 흐르고, 모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모두 박수를 쳤다. 윤동주가 주저하지도, 사양하지도 않고 노래를 불렀던 것은 급우 전원이 자신의 송별회에 참석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이 기념사진을 찍은 후 약 한 달 뒤인 1943년 7월 14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한글로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2년 형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윤동주의 사망원인은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 그해 같은 혐의로 같은 형무소에서 고종사촌형인 송몽규(교토제대 재학 중 윤동주와 비슷한 시점에 체포되어 1945년 3월 10일 사망)도 윤동주의 뒤를 따라 옥사했다. 죽기 직전 친척들에게 전한 송몽규의 증언에 의하면, 두 사람 모두 매일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윤동주의 유해는 북간도에서 달려온 아버지의 손에 의해 화장되었다. 유골함에 다 담지 못한 윤동주의 유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한일해협에 뿌려졌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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