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비틀즈의 마지막 콘서트

2012. 7. 30. 07:21音樂·샹송·팝

 

비틀즈(BEATLES)

비틀즈의 전설적인 마지막 콘서트인 '루프탑 콘서트'(rooptop concert)입니다
69년 1월30일 추운겨울날 비틀즈는 이즈음 멤버들의 불협으로 해체의 길을 가고 있던 시기 입니다
'렛잇비'다큐멘터리 영화의 끝부분에 실린콘서트인데 도심한가운데의 빌딩옥상에서 관객은 스텝진과 카메라맨이 전부였습니다.. 점심시간의 해프닝으로 엄청난 도심한가운데의 앰프음으로 일대소동이 일어나며
경찰이 출동하고 기타선을 빼고 비틀즈는 다시 침착하게 연결하여 연주를 마칩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소음의 진원이 최고의 비틀즈인줄 나중에 알고
대단한 소동을 일으킵니다...비틀즈다운 재치의 콘서트죠..
영화에는 경찰출동,사람들의 소동이 자연그대로 여과없이 들어 있습니다..
.이 "한낮의 해프닝'은 나중에 역사적인 공연으로 남게되지요. 존레논은 마지막곡'get back'을 마치고 유명한 멘트를 남깁니다
."이로서 우리는 오디션을 멋지게 통과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한 전설로 역사속으로 남습니다
 
 
 
사상 최악의 공연 - 필리핀 방문
 
1. 필리핀 도착
1966년 6월 24일 비틀즈는 세계 순회 공연을 떠나게 된다. 서독과 일본, 그리고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공연이었다. 앨범 『Revolver』녹음 작업을 끝내놓고 홀가분하게 떠난 순회 공연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 역사상 가장 철저한 경호 - 64년 동경 올림픽보다 더 많은 경찰이 배치되었다고한다. - 속에서도 그나마 호텔에서 그림도 그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던 비틀즈. 그렇지만 다음 공연지인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벌어질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7월 3일 찌는 듯한 더위에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인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 비틀즈는 도착했다. 도착부터 낌새가 이상했다. 조지 해리슨의 말을 들어보자.
 
"어디를 가나 우리의 매니아들은 있었습니다만, 우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예인이었기에 어느정도 존중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마닐라에서는 처음부터 우리의 행동을 강요했습니다. 공항에 도착해 차에 올라타자 운전사는 닐을 뒤에 남긴채 그냥 떠났습니다. 우리의 짐들은 따로 숙소로 보내졌죠. 저는 생각했습니다. '걸렸다. 우리는 체포된 거야'"
 
"그들은 우리를 마닐라 항구로 데려가더니 보트에 태워서 호텔방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우리는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두려움에 떨었죠. 처음으로 닐 애스피널, 맬 에반스,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떨어져 우리 넷만 있었던 겁니다. 총을 든 경찰들이 호텔방 주위를 삼엄하게 경비했습니다. 오지 말걸 하는 생각이 들었을정도입니다."
 
2. 이멜다 마르코스의 초대
공연 하루 전인 7월 3일 마닐라 선데이 타임즈는 마르코드 대통령 내외가 4일 오전 11시 말라카낭궁에 비틀즈를 초대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비틀즈는 11시 초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단지 4시에 말라카낭궁에 잠시 얼굴을 비추라는 요청만 받았고, 공연이 4시에 시작이었기 때문에 그 초대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초대 또한 강압적이었다. 7월 4일 아침 몇 명의 경찰이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깨웠다. 말라카낭궁에서 열리는 이멜다 마르코스의 파티에 비틀즈를 참석시키라는 명령에 가까운 초청이었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정치적 의도가 있을지 모르는 정치인과의 만남을 원치 않았고, 비틀즈는 11시 초대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TV에서는 비틀즈를 기다리는 이멜다 마르코스의 모습을 애처롭게 비추었고, 그 광경은 필리핀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모독으로 다가왔다.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 내외)
 
3. 10만명의 팬들
7월 4일 비틀즈는 오후 4시와 밤 8시 30분 마닐라의 축구 경기장인 'Rizal Memorial Football Stadium'에서 두 번 공연을 가졌다. 각각 5만명씩 총 10만명이 모여들었다. 최대한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서 경기장에 의자를 갖다 놓았고, 첫 곡인 'Rock'n Roll Music'이 울려퍼지자 팬들은 무대로 몰려들었다. 통상적인 비틀즈 공연이나 마찬가지였다. 팬들중에는 14살의 찰리 산토스도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공연을 회상했다.
 
"폴 매카트니가 Yesterday를 혼자 불렀습니다. 저는 마치 레코드를 듣는 것같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사람들도 라이브 공연이 훨씬 더 듣기 좋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공연 자체만 본다면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문제는 공연이 끝나고 난 다음날이었다.
 


(비틀즈의 마닐라 공연 프로그램)
 


(비틀즈의 마닐라 공연 티켓)
 
3. 열받은 이멜다 마르코스
비록 비틀즈가 11시 초대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멜다 마르코스는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솟았다. 감히 일개 가수 주제에 필리핀의 국부와 국모가 초대한 파티에 참석하지 않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으리라. 1929년에 태어나 미스 마닐라에 당선된 후 마르코스와 결혼하여 국모의 지위를 누리고 있던 그녀로서는 서양에서 가장 인기있는 네 명의 젊은이들을 만나고 싶은 소박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비틀즈는 - 비록 고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 그녀의 초대를 거절한 셈이 되었고, 그러한 비틀즈의 반응은 도도한 이멜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욕이었다. 당시 필리핀은 계엄령 치하였고, 마르코스 내외의 권력은 그야말로 막강하여 감히 그들의 말을 거역하는 이가 없었는데, 비록 다른 나라사람이기는 하지만, 일개 가수가 내 말을 우습게 여기다니. 비틀즈는 괘씸죄에 걸리고 만 것이다. 마닐라 타임즈의 헤드라인 제목이 '이멜다 열받다!'(Imelda Stood Up!)이었을 정도로 이멜다의 분노는 극에 달았다. 비틀즈가 이멜다의 초대를 거절했다는 보도가 전해지자 필리핀 국민들도 격앙하기 시작했다.
 
필리핀의 흥행사인 라몬 라모스(Ramon Ramos)는 비틀즈의 공연 출연료를 주지 않겠다고 이야기했으며, 비틀즈에게 폭탄 테러를 하겠다는 협박이 영국 대사관과 비틀즈가 묵은 호텔에 전해졌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자,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궁여지책으로 사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렇지만 막상 그 인터뷰가 TV를 통해 방영되었을 때 원인을 알 수 없는 전파 방해가 일어나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 인터뷰를 보지도 못했다. 이 전파 방해가 마르코스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4. 세금 안내면 못나가!
이제 비틀즈는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7월 5일 비틀즈는 예정대로 출국 비행기를 타려고 하였으나, 필리핀 당국은 그리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필리핀 세무 당국에서 비틀즈가 세금을 전액 내지 않는다면 출국할 수 없다고 명령했다. 출연료조차 한 푼 받지 못한 비틀즈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지금 누가 옮고 그른 것을 따질 게재는 아니었다. 1초라도 빨리 무사히 출국할 수 있다면 그깟 돈이 문제랴.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부랴 부랴 자신의 지갑에서 1만 8천달러를 당국에 냈고 간신히 출국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5. 죽느냐 사느냐
간신히 출국 허가를 얻어 공항으로 향하는 비틀즈. 그러나 공항으로 가는 길은 과거처럼 편안한 길은 아니었다. 공항으로 가는 차도 간신히 구했을 정도였다. 마닐라 당국은 도착할 때 그렇게도 많은 경찰들의 호위를 가는 길에는 아예 치워 버린 것이다. 성난 군중들은 그야말로 물밀 듯이 호텔에 모여들었고, 비틀즈는 문자그대로 사람들의 발길질과 주먹질을 피해가며 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비틀즈에게 발길질과 주먹질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경찰들이었다. 자신들이 떠받드는 국모를 업신여겼다는 보도에 흥분한 것이다.
 
그렇지만 공항에도 그들을 기다리는 약 200명의 성난 필리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공항 당국 역시 비틀즈가 편안히 출국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에스컬레이터 작동을 중지시킨 것이다. 비틀즈는 다시 한 번 계단을 오르며 사람들의 뭇매를 감당해야만했다. 특히 링고는 누군가의 어퍼컷 한 방을 맞아 땅바닥에 뒹그르면서 무릅을 다치기도 하였다. 맬 에반스와 브라이언 엡스타인도 부상을 입었고, 비틀즈의 운전사인 앨프 빅넬 역시 갈비뼈를 다쳐 수술까지 받아야했을 정도로 신체적인 모독과 상해를 입었다. 당시 존 레논은 공항에 있던 수녀들 근처로 피신을 했다고 한다. 그마나 수녀들옆에 있으면 발길질과 주먹질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가까스로 비행기에 올라탔을 때 성난 군중들은 '비틀즈 알리스 다얀!'(Go Home Beatles!)라고 외치면서 야유를 보냈다.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공항 당국의 트집 때문에 비틀즈는 40분이나 비행기안에서 공포에 떨어야했다. 맬 에반스와 토니 배로우는 공항 당국이 요구한 서류를 준비하느라 정신없었다.
 
        
        
(필리핀에서 비틀즈의 모습)
 
6. 뒤늦은 발표
비틀즈가 탄 비행기가 이륙한 후 불과 몇 분 후, 마르코스 대통령은 대변인을 통해 "비틀즈는 대통령 영부인이나 필리핀 공화국을 모독할 의사는 없는 것으로 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미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 비틀즈에게 뒤늦은 위로였다. 7월 6일 마닐라 주재 영국 대사관은 비틀즈가 겪은 부당한 일에 대해서 필리핀 정부에 항의를 하였다.
 
7. "다시는 필리핀에 가지 않겠다!"
이 필리핀 소동은 비틀즈가 겪은 가장 끔찍한 경험이었다. 조지 해리슨은 "만약 제게 원자 폭탄이 있다면 필리핀에 떨어드리고 싶습니다"고 할 정도로 지긋지긋한 악몽이었다. 존 레논 역시 "필리핀 하늘을 나는 비행기안에는 절대로 제가 타고 있지 않습니다. 그곳 하늘을 지나는 비행기에도 타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8. "이제 다시는 공연하고 싶지 않아!"
이 필리핀 공연은 단지 비틀즈가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는 것이외에도 비틀즈의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이미 대중들앞에서 꼭두각시마냥 듣지도 들리지도 않는 연주를 하는데 지친 비틀즈에게 필리핀 사건은 그야말로 공연에 대해 학을 떼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영국으로 돌아오면서 비틀즈는 "이것으로 끝이다. 다시는 공연하지 않을거야!"라고 선언을 했다. 그렇지만 이미 미국 순회 공연은 계획되어 있었고,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비틀즈를 달랬다.
 
 "미안하네, 친구들, 이미 쉐어 스태디움 공연이 예약되어있네. 만약 그 공연을 취소한다면 몇 백만달러를 물어주어야하네..."
 
그 순간 미국에서는 존 레논의 예수발언으로 인해 일어난 '비틀즈 배척 운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존 레넌 : 정치와 음악, 노동자계급(1) (46~49pp.)

1971년 1월 21일 "붉은 두더지(Red Mole)" 편집자 로빈 블랙번과 타리크 알리와의 인터뷰

"저처럼 성장한 경우라면 경찰을 천적으로 증오하고 두려워하는게 기본이죠. 군대도 모든 사람을 어디론가 데려가 죽은 채로 내벼려 두는 곳으로 경멸하는게 기본이죠. 제 말은 나이가 들고 가족이 생기고 체제에 흡수되면서 사라지긴 해도, 기본적인 노동자 계급성 같은 거라는 거예요."

"저는 계급을 무척 의식했죠. 저는 저에게 일어난 일을 잘 알고 있었고, 우리에게 가해지는 계급억압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같은 사실이지만, 비틀즈의 태풍 속에서 그것은 사라졌고, 저도 시대의 현실에서 멀어졌어요."

"하지만 여러분은 제가 항상 억압당하고 있다고 느꼈다는 점을 기억해야 되요. 우리는 모두 항상 압박을 받고 있어서 자신을 표현할 기회가 거의 없었고, 계속 투어를 하면서 바쁘게 일할 때에는 더욱 그렇죠. 항상 신화와 꿈의 고치 속에 갇혀 있죠. 여러분이 시저가 되고 모든 사람이 당신이 훌륭하다고 말하고 모든 멋쟁이와 여자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거기 빠져나오기 아주 힘들죠. '나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아. 현실적이고 싶어'라고 말하기 아주 힘들죠. 그래서 나름대로 제가 말한 두 번째 정치적인 것은  '비틀즈가 예수보다 위대하다'고 말한 거죠."

"[비틀즈의 성공에 대해] 이런, 그건 완전한 억압이었어요. 제 말은 우리가 중산층과 쇼비즈니스, 정치인들 떄문에 계속 굴욕을 당했다는 의미죠. 그들은 항상 거만하고 멍청했어요. 모두가 우리를 이용하려고 했죠. 그건 저에게 특별한 치욕이었죠. 왜냐면 결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항상 이 압력을 이기려고 술을 마시거나 약을 먹어야 했어요. 그건 정말 지옥이었죠."

"저는 어렸을 때 항상 싫어했던 종류의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즐겁게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죠. 이런 사실이 저를 현실로 돌려보내기 시작했어요."

"[블랙번 : 어쨌든 정치와 문화는 연결되어 있잖아요? 현재 노동자들은 총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 억압다고 있다는 거죠…] 노동자들은 일종의 마약에 취한 상태죠…"

[블랙번 : 그리고 그들을 취하게 하는 문화는 예술가들이 만들거나 부수는 문화죠…]

"그게 바로 제가 앨범에서 또 이 인터뷰에서 하려고 하는 거죠. 제가 하려는 일은 제가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거예요. 아직 꿈을 꾸고 있고 마음 속에서 커다란 물음표를 던지는 모든 사람들이요. 약의 힘을 빌리는 꿈은 끝났다. 이게 바로 제가 말하려는 바죠."

"[yellow submarine, 개사곡에 대해] 미국운동권이 '평화에게 기회를'을 부를 때 기뻤죠. 왜냐면 정말로 그걸 마음에 두고 곡을 썼기 때문이죠. 저는 1800년엔가 만들어진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는 대신 뭔가 현대적인 걸 부르길 바랬죠. 저는 그 당시에도 술집에서 또는 데모할 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었어요. 이건 지금 제가 혁명을 위한 노래를 작곡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구요…"

"우리가 어렸을 때 포크송에 반대했던 건 아주 중산층 취향이었기 때문이죠. 커다란 스카프를 두른 대학생들이 맥주잔을 들고서 우리가 라딜라 목소리라고 부르는 식으로 '나는 뉴-카-슬의 광산에서 일했다네'라고 부르는데, *같은 것이었죠. 제가 비록 도미닉 베헌을 좀 좋아하고 리버풀에서도 들을 수 있는 좋은 곡이 몇곡 있지만 진정한 포크송 가수는 아주 극소수죠. 아주 가끔씩 라디오나 TV에서 아주 오래된 레코드로 아일랜드나 다른 곳의 진짜 노동자들이 이런 노래를 하는걸 들을 수 있는데, 그 파워는 환상적이죠.

그러나 대개 포크뮤직은 낭랑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뭔가 오래되고 이미 죽어버린 걸 살리려고 애쓰는 것 같아요. 오늘날의 진정한 포크송은 록앤롤이죠. 비록 어쩌다가 미국에서 나왔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음악을 만들기 때문에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고, 바로 그 사실이 모든 걸 변화시켰죠."
출처 : 내마음은 황무지
글쓴이 : Jum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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