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令夫人의 品格"

2024. 8. 25. 18:19위정자를 향한 獅子吼

역대 영부인 가운데 가장 정갈하고 자애로운 모습의 육영수 여사,

그는 충북 옥천의 거부 육종관씨의 1남 3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3천평의 99칸 짜리 집에서 수십명의 하인을 둘만큼 부자집이였다. 

충북 옥천 육영수 여사의 생가

 

1974년, 

8,15 광복절 기념행사 참석중, 문세광의 훙탄에 운명한지도 50년이 지났다.

그는 생전에 매달  남편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20만원의 활동비를 받아

하루 40여통의 편지가 오는 민원을 해결하는데 썼다고 한다.

틈만나면 전국 77곳의 나환자촌을 찾아 환자들의 손을잡고 안아 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문둥병이 전염될까 극심하게 꺼려하던 시절이다.

나환자 그들이 농사지은 사과를 내밀며 이것밖에 드릴게 없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한입을 베어 먹으며 "너무 맛있다"고 하며 남편에게 갖다

드려야 겠다고 하여 모든 나환자들을 울게했던 그였다.

또한, 저렴한 국산 옷감을 손수 디자인해  가까운 양장점에서 만든것들로

자신이 입던 옷을 큰 영애인 박근혜가 서강대 수석 졸업의 상을 받을때도

입게 하였고 "새옷을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말 했다고 한다.

또한, 대통령을 대신해 큰 영애가 하와이 교민 행사에 일반인들과 함께 KAL를

타고 참석할 때도 어머니가 입던 옷을 입게했을 정도로 검소했다.

 

"육영수 여사가 기록한 가게부"

 

비서진들과의 식사에도 멸치볶음과 말린 꽁치같은 간소한 식단이였고,

평소 바른말을 하는 사람을 고마워하던 대통령 내외는 ,

비서진이 대통령께서 모 여배우와 연애한다는 소문이 났다고 이야기 하면,

"아시아 영화제 참석자들 초청때 악수한 기억밖에 없는데" 화를 내지 않았다.

특히 육여사는 비서관들이 추켜 올리는 말을 하면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마세요"

듣기 불편한 말도 싫어하지 않았다.

여사는 모든 행사에 참석할 때도 대통령과 함께 손을 흔들지 않았으며

동선에서도 대통령과 두 세발 뒤에서 걸었고 자동차나 어느 자리에 앉아서도

등을 기댄적이 없었다.

그는 청와대 접견실에서 손님을 맞았지만 선물을 갖어온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아예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양주동, 박목월, 봉두완 씨를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평소 그에게 오는 전화는 빈민 구제를 위해 자신이 세운 양지회' 회원들 뿐이였고

장관이나 의원들 부인과의 통화도 없었다.

또한 국정개입은 상상도 못할 일이였고 "대통령이 하실일" 이라며 나서지 않았다.

억울한 국민의 민원도 대통령에게만 전하고 일체 간섭하지 않았으며,

대통령 비서실에 전화를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언제나 민심을 대통령에게 알려 지적하던 청와대의 야당이라 불리던 영부인이였다.   

이같은 사실은 청와대 부속실에서 근무한 비서관의 육성 녹음의 증언이다.

가인박명(佳人薄命) 이라 했던가?

문세광, 흉탄의 피살만 아니였어도 대한민국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淸州j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