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최배달, 역도산

2014. 3. 19. 01:38스포츠·golf 外

 

최배달, 역도산

 

 

1923년 태어난 최영의는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여러 무술을 섭렵했다. 택견이나 씨름 같은 전통무예를 시작으로 부유한 부모의 적극적인 지원에 심지어 차비, 소림무술 등의 타국 무술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1939년 16세의 나이로 일본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꿨던 가라데(공수도)를 접했다. 배달의 민족이라는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그 때부터 최배달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가라데에 흠뻑 빠지며 끊임없이 단련하던 소년 최배달은 1946넌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좋은 무사가 되기 위한 지침서)를 읽고 외롭고 고독한 길을 택한다. 무도인으로 살겠다는 일념 하에 입산수련을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1개월 뒤 미노부산에 올라가 본격적으로 무도를 연마했다.

 

당시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계곡에서 목욕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이후 오두막까지 달려와 바벨을 드는 등 몸만들기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그리고 식사와 독서를 한 뒤 오후부터 본격적인 공수도 단련을 시작했다.

 

나무줄기에 덩굴을 감고 정권, 수도, 관수(貫手), 발차기 등 모든 기술을 연마했고 1년 반 동안 오두막 주변의 나무들은 거의 다 말라버렸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여름이든 겨울이든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나무를 주먹으로 쳐대며 수련했기 때문이다. 맨손으로 부순 돌조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쌓여갔다.

 

또한 밤에는 원을 그린 종이를 벽에 붙이고 정신을 통일했다. 한 명의 말상대조차 없는 산 속에서 겪는 고독감은 상상을 초월했으나 짐승의 울음소리로 외로운 마음을 달랬고, 먹이를 주며 여우와 친해지기도 했다.

 

산에서 내려온 그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열린 전일본가라데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무도가로서의 첫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정통 가라데는 실제 타격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전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직접 타격을 가하는 극진 가라데를 창시했다.

 

산에서 내려온 지 2년이 지난 후 24세의 최배달은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각 공수도장의 수장들에게 대결을 신청했다. 이른바 도장깨기의 시작이었다. 그때 그는 일본 가라데의 10대 문파를 대표하는 고수들을 모조리 쓰러트리며 무적의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배달은 치바의 다테산에서 20개월간의 입산수행을 또 다시 겪고 내려왔다. 처음 경험했던 입산수련을 통해 확실히 강해질 수 있었던 최배달은, 두 번째 입산수련을 통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일본 내의 가라데 고수와 맞붙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고민 끝에 최배달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고른 상대는 황소였다. 일본 치바의 타헤야마 도살장을 찾아간 그는 대뜸 주인에게 "소를 죽이게 해주십시오. 제 주먹이 소를 죽일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습니다"라고 부탁했다.

 

최배달이 상대한 소는 총 47마리였고, 그 중 4마리는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한다. 물론 거칠게 날뛰는 황소 때문에 최배달 역시 큰 상처를 여러 번 입어야 했고 황소가 다리를 깔고 앉는 바람에 노후시절 무릎에 큰 후유증을 겪어야만 했다.

 

더 이상 최배달은 단순한 가라데카가 아니었다. 실전 최강의 파이터로 거듭난 것이다. 그때(1951년)부터 최배달은 종목을 가리지 않고 유도, 검도 등의 다양한 고수들과 결투를 벌였고, 이후에는 세계를 누비며 복싱, 무에타이, 레슬링 등 각 격투종목의 강자들을 상대로 무패행진을 이어갔다.

 

맨손으로 황소를 때려잡고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고수들을 모조리 꺾고 다니는 것이 알려지며, 최배달은 유명세를 타게 되고, 1958년 미국 FBI와 미육군사관학교로부터 극진가라데를 지도해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최배달이 꺾었던 대표적인 인물은 실전공수의 원조 사카하라, 면도날 가미소리 모리, 나고야의 닌자 미와노부오, 미국 레슬링 챔피언 레드 아이, 하와이의 붉은 전갈 톰 라이스, 태국 무에타이 챔피언 블랙 코브라 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세계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최배달은 도쿄에 대산도장이라는 이름의 공수도장을 설립하고 처음으로 제자를 양성하기 시작한다. 낭심 공격, 급소 가격이 모두 허용된 실전공수도였다. 70%의 무도인들이 일주일을 견뎌내기 힘들 정도로 고된 과정이었지만 남는 이들은 있었다.

 

최배달은 1964년 도장의 이름을 극진회관으로 바꾸었고, 1969년에는 처음으로 타종목 선수들의 출전을 허용한 전일본선수권을 개최했으며 1975년에는 세계대회가 열렸다. 현재는 세계 16개국 72개의 지부가 활동 중에 있다.

 

 

김신락은 1924년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의 집안은 타고난 장사 집안이었다고 전해진다. 김신락 뿐만 아니라 두 명의 형 역시 또래 아이들에 비해 체격이 크고 근력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의 부친은 약초를 캐 아들들에게 자주 먹였다고 한다.

 

14세 시절 김신락은 전국소년씨름대회에서 우승하며 운동에 두각을 나타냈고, 1938년에는 16세의 나이에 성인 씨름대회에 참가해 3위에 오르며 주변을 놀라게 했다. 말 그대로 소년 장사였다.

 

어린 나이에 보인 재능은 역도산의 인생을 바꿨다. 김신락의 활약을 지켜보던 일본인 형사가 일본에서 스모 선수로 활동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 것이다. 김신락은 일본에서 스모 선수로 활동하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나, 두 형의 징용 면제와 국내에서 꿈꾸기 어려운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현해탄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그의 부모는 스모 진출을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아들의 일본행을 막기 위해 급히 결혼을 시키지만 김신락은 신혼 첫날 밤 도주해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다른 이유는 없었고, 자신이 성공하면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 하나였다.

 

그리고 그는 형사의 소개로 스모단에 입단했으며 이듬해부터 역도산이란 예명을 사용했다.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한다는 것은 예상보다 힘들었다. 훈련보다는 잡다한 뒷일이 우선이었고, 민족차별은 물론 인간적인 모욕에도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요코즈나가 되겠다는 목표 하나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상상 이상의 훈련을 소화하면서 실력은 빠르게 향상됐다.

 

피나는 노력 끝에 그는 마침내 스모의 3등급인 세키와케에 오른다. 이런 상승세라면 요코즈나 등극은 시간문제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스모계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역도산의 2등급 입성을 방해하는 등 가만 두지 않았다.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에 그는 한동안 술로 마음을 달래고 싸움까지 일삼았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1950년 역도산은 스모마케(상투머리)를 과감히 잘라버렸다. 스모계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때부터는 살기 위한 투쟁이었다. 한국인으로는 핍박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는 일본인 형사의 양아들로 호적을 올려 일본인으로 위장하는 선택을 했다.

 

1951년 일본의 한 클럽에서 역도산은 인생이 또 한 번 바뀌는 계기를 맞는다. 미국 프로레슬러와 주먹다짐을 하게 됐는데, 힘에서는 그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역도산이지만 프로레슬러에게 맥없이 패하고 만다. 하지만 그 과정을 겪으며 프로레슬링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다음날 상대했던 미국인을 찾아가 가르쳐달라고 애원한다. 그리고 미국으로 1년간의 프로레슬링 유학을 떠난다. 11년 전 스모 선수로 성공하겠다고 일본에 왔던 그가 비슷한 선택을 한 것이다.

 

이후 그는 선수이자 프로모터로 해외 선수들을 불러들여 일본에서 경기를 펼쳤고, 승승장구하며 주가는 점점 올라갔다. 특히 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미국에 대한 열등감이 강했던 일본인 만큼 역도산이 거구의 미국 선수들을 물리칠 때마다 일본 열도는 들썩였다. 결국 역도산의 활약으로 프로레슬링은 TV에 생중계됐고, 역도산이 출전하는 경기는 시청률 50%가 넘는 게 다반사였다. 당시의 역도산은 일왕 다음으로 인기가 높았다고 회자된다.

 

역도산은 프로레슬링을 뒤늦게 시작했으나 타고난 힘과 체력, 특유의 가라데촙을 내세워 WWA, NWA, AWA, 월드리그 등의 타이틀을 보유한 당대 최고의 선수에 올랐다. 유명세를 타며 재벌이 된 그는 경기장 설립도 하는 등 프로레슬링 저변확대에 앞장섰다.

 

하지만 역도산의 말미는 결코 좋지 못했다. 역도산이 일본에서 영웅으로 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겼기에 가능했다. 심지어 자녀에게조차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즉 그는 성공을 위해선 무엇이든 한다는 인생관을 갖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비열한 모습도 많이 보였다고 한다. 주변의 비판을 아랑곳하지 않았고, 자신의 위치를 넘보는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복수하는 모습도 보였다.

 

프로레슬링은 정해진 각본 안에서 진행되는 경기이기에 그 각본을 짤 수 있는 힘만 있으면 얼마든지 영웅이 될 수 있다. 즉 각본을 짜는 이의 의도에 따라 희비가 크게 갈린다. 이에 역도산은 각본을 어기고 상대를 무참히 짓밟는 등의 룰을 어기기도 했다.

 

특히 1954년 열린 기무라 마사히코와의 경기(3차전)는 국내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경기 중 기무라가 실수로 급소를 차는 반칙을 저지르자 역도산이 곧바로 실전에 돌입했고,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은 끝에 기무라는 실신하고 말았다.

 

부와 명예를 가졌지만 불안한 현실에 안정된 삶을 영위하지 못하던 그는 1963년 일본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야쿠자의 칼에 찔려 수술을 받았으며, 결국 열흘간 힘겹게 버티다 복막염 진단을 받고 4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안타까운 점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겼던 그가 조국으로 눈을 돌리려는 순간 죽음을 맞았다는 것이다. 역도산은 1964년 도쿄올림픽의 남북 공동참가를 추진했으며 북한의 참가비용까지 직접 지불하겠다고 나섰다. 또한 운명하던 해 조국을 방문했을 때는 경기장을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기무라 마사히코가 링에서 역도산에게 무참히 맞으며 실신할 당시, 기무라의 코너에는 최배달이 있었다. 최배달은 유도를 배우기도 했으며, 13년간 일본유도선수권에서 우승했던 유도 영웅 기무라를 극진히 대우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만 해도 프로레슬링이 각본에 의해 펼쳐지는 경기라는 것을 일본 팬들은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무라의 코너에 있던 최배달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기무라가 쓰러지자 곧바로 링으로 올라가 기무라의 상태를 확인했다.

 

최배달은 역도산의 그 모습을 보고 비신사적인 행위라고 간주했으며, 이후 역도산과의 관계는 악화됐다. 최배달이 몇 차례에 걸쳐 대결을 청했으나 역도산이 이를 피했다는 주장도 많다.

 

오로지 실전이라는 부분만 놓고 보면, 최배달의 업적과 역도산의 그것은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최배달은 오로지 실전을 추구한 인물로, 일본은 물론 세계 각지를 돌며 무수한 고수들과 실전을 벌이며 무패신화를 달성했다.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을 꼽는 것에 오로지 실전 결과만이 전부가 될 순 없다. 적어도 당시 일본사회에 전반적으로 미친 영향력은 역도산이 압도적으로 앞선다. 최배달이 홀로 산에서 수련하고 조용히 무림고수들을 상대했다면, 역도산은 일본 국민 대부분이 보는 앞에서 경기를 펼쳤고 늘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일왕 다음 역도산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당시의 역도산은 일본인들에게 힘을 북돋아주는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과거 장정구가 복싱 세계타이틀전을 할 때면 서울 도심이 한산해졌을 정도라고 하는데, 역도산은 그것을 능가했다. 기무라와의 3차전은 10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후문도 있다.

 

그리고 둘은 훌륭한 후계자를 남겼으니 그 인물이 바로 박치기 왕 김일과 극진회관의 문장규 관장이다. 역도산은 재떨이와 골프채로 매일 김일의 머리를 가격하며 단련을 거듭한 끝에 박치기를 완성시켰고, 김일은 은퇴까지 20여개의 타이틀을 따냈다. 그리고 김일은 이왕표라는 후계자를 남기고 2006년 생을 마감했다.

 

문장규 관장은 최배달의 젊은 시절을 담은 만화책을 보고 극진가라데에 입문했고, 20대 초반 시절 전일본극진가라데선수권에서 2연패를 달성했으며, 제 4회 세계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스승의 무공을 가장 제대로 전수받았다고 평가 받는 그는 3단 심사에서 극진 최고의 관문인 100인 조수에 성공한 바 있다. 현재도 스승의 뜻을 계승하며 극진가라데의 위상을 굳건히 하고 있다.

 

 

 

 

출처 : 느 티 나 무
글쓴이 : 전병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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