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5. 09:12ㆍ詩,
청산은 나를 보고..나옹선사의 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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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 山 兮 要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선시 해석 :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인간사회에는 말이 많다.
당치않은 이유나 변명도 많고,
탓도 많고, 자기자랑도 많다.
청산(靑山)처럼 푸르게 듬직하게 말없이 살라는
나옹(懶翁)의 가르침이 먼저 마음에 와 닿는다.
청산이란 넓은 의미에서 뼈를 묻는 산 즉,
분묘(墳墓)의 땅이란 뜻도 있어서
이 낱말을 대할 때 마음속엔 친근감과 함께 숙연함을 느끼게 된다.
티없이 산다는 것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가꾸라는 뜻이다.
나옹은
창공(蒼空)처럼 티없이 맑게 살라고 가르침을 준다.
푸른 하늘에는 은하수도 흐르거니와
그 곳엔 절대적인 조물주의 권위가 존재한다.
따라서 옛부터 인간들은 하늘에 맹세를 하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산다고 시로도 읊었다.
창공처럼 티없이 깨끗이 살라는 표현은 심금을 울린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는
인간의 본성 중에서도 가장 흉하다 할 수 있는 마음을 경계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란 뜻이 되겠다.
탐욕은 고귀한 인간의 이성과는 거리가 먼
미욱한 사람의 전유물이다.
다듬지 않고 정화되지 않은 가치관에 사로잡혀
남은 아랑곳없이
나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보기 흉한 심리작용이다.
우리들은 주변에서 탐욕에 눈이 먼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다.
성냄이란 화를 낸다는 뜻이다.
화를 낸다는 것은 미워한다는 사실과도 상통한다.
분노나 증오 감정은 건강에 지극히 해롭다.
그것은 곧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스트레스는 몸의 면역기능을 저하시키고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약화시켜서 건강을 해치게 된다.
인생은 사랑 속에 살면 행복하고,
증오와 분노 속에 살면 불행하게 되어있다.
사람의 웃는 얼굴은 아름답고
성낸 얼굴은 그 사람이 간직하는 표정 중에서
가장 못난 얼굴이다.
눈은 째지고 눈꼴이 올라가거나 내려가고
입가에는 경련이 일고 때에 따라서 게거품을 물게 된다.
얼굴색도 붉으락푸르락이니
누가 보아도 입맛이 가시고 혐오스런 표정이 된다.
그러지 않아도 인종적으로
별로 잘 생기지 못한 몽고리안 얼굴을
부드럽게 인상 좋게 가꾸지는 못하더라도
화를 내서 흉측한 표정을 짓는 일은
본인을 위해서나 타인을 위해서나 삼가는 것이 현명하겠다...
- 모셔온 글 -
나옹선사 : 고려 말의 명승으로 본명은 혜근(慧勤:1320∼1376)
나옹선사도 공민왕이 살해된지 2 년만에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이 57세의 나이로 죽었다는 사실에는 정치적인 음모가 숨어 있었던 것으로 후세 사람들은 유추하고 있다.
나옹화상 혜근 (懶翁和尙 慧勤)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慧勤, 1320∼1376)은 고려 말의 고승이다.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선관서영(膳官署令) 아서구(牙瑞具)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출가하기를 원하였으나 부모가 허락하지 않았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무상(無常)을 느끼어 출가를 결심하고, 문경에 있는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찾아가 출가하였다. 그 후 전국의 사찰을 편력하다가 1343년(충혜왕 4)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 4년간 머물며 정진한 끝에 크게 깨달았다. 이 절에 우거하고 있던 일본 승 석옹(石翁)에게 깨달음을 인가 받았다.
27세 때인 1347년(충목왕 3) 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몇 년간 인도 승려 지공(指空)의 지도를 받으며 지내고, 정자선사(淨滋禪寺)에서 평산처림(平山處林)을 만난다. 지공과 평산처림은 혜근의 선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후 혜근은 중국의 산천을 수년간 두루 유람하며 구도에 전념하다가, 이를 들은 원나라 순제(順帝)의 명으로 연경의 광제선사(廣濟禪寺)에 머물게 된다. 그곳에서 크게 법회를 열어서 많은 고관과 고승 앞에서 설법하여 큰 감명을 주었다. 수년간 그곳에서 지내다가 다시 유람 생활을 하던 혜근은 지공을 찾아가서 허락을 받고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머물렀다. 공민왕은 그를 왕사(王師)로 봉하였다. 이후 왕과 태후의 간곡한 청에 의하여 몇 년간 신광사(神光寺)에 머물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이후 여러 산을 유람하던 그는 49세 때에 병으로 오대산 영감암(靈感菴)에 머물렀고, 그 뒤 공부선(功夫選)을 주관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371년 왕으로부터 금란가사와 법복(法服) ‧ 바리를 하사받고 ‘왕사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해졌다. 1377년 스스로 예언한 바에 따라 57세, 법랍(法臘) 37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그는 간화선(看話禪)의 입장을 취하였는데, 종래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이나 조계종과는 다른 임제(臨濟)의 선풍을 도입하였고 조동종(曹洞宗)의 요소도 도입하여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는 염불을 중요시하였고, 이는 이 후 우리나라 선종에서 계속 전승되었다. 염불을 하면 삼악도(三惡道)에서 벗어나고 정각(正覺)을 이룬다고 하였다.
그는 고려 말 보우(普愚)와 함께 조선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운 위대한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왕명으로 밀양 영원사(瑩源寺)로 옮기던 중 5월 15일 나이 56세, 법랍 37세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관심은 고려 말 혼란한 시기에 방황하는 민중의 정신적 구제에 있었다. 조정과 밀착되어 있던 다른 고승들과는 다른 모습으로서, 대중을 교화하고자 누구보다 많은 게송을 짓고 불교 가사(歌辭), 선시를 남겼다. 영남지방에는 그에 관한 많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것도 그의 대중 포교의 결과일 것이다. 《 성무경/문학박사》
나옹 왕사의 ‘無聞’
나옹 왕사의 이름은 원혜(元慧), 법명은 혜근(慧勤), 법호는 나옹(懶翁), 속성은 아(牙)씨, 평생 주석하신 당(堂)은 강월헌(江月軒)이다. 왕사는 나이 20세에 친구의 죽음을 보고 무상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어른들에게“죽으면 어디로 갑니까”하고 묻고 다녔다. 하지만 모두들 모른다고 대답했다. 마음의 답답함을 풀길이 없자 공덕산 묘적암에 주석하고 계신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출가했다.
요연 선사는 물었다.“무엇 때문에 중이 되려 하느냐?.” 이에 왕사는 “삼계(三界)를 뛰어넘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고 말하자 요연 선사는 출가를 허락했다. 그 뒤 왕사는 운수납자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25세 때 회암사로 들어가 용맹정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스님 석옹화상(石翁和尙)이 승당에 내려와 선상을 치면서“대중은 이 소리를 듣는가”라고 크게 소리를 쳤다.
아무도 이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왕사는 홀연히 방에서 일어나 대답하였다. “선불장 안에 앉아 정신 차리고 자세히 보라(選佛場中坐 惺惺着眼看), 보고 듣는 것이 다른 물건이 아니요 원래 그것은 옛 주인이다(見聞非他物 元是舊主人).”용맹정진 4년 왕사께서 29세 때 겨울, 눈이 쌓인 뜰을 거닐다가 때 이른 매화꽃(梅花)을 보고 대오(大悟)하셨다.
"눈과 귀는 원래 자취가 없거늘
,
누가 그 가운데서 원만히 깨칠 것인가.
텅 비어 형상 없는 곳에서 몸을 굴리면
,
개 짖음과 나귀 울음이 모두 도(道)를 깨침이네. "
이후 왕사께서는 중국 연도(燕都)에 들어가 법원사(法源寺)에 주석하고 있는 지공 선사(指空禪師)를 찾았다. 지공이 물었다.“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누가 그대를 여기 오라하던가.” “고려에서 혜근이 스스로 왔습니다.”지공은 허락했다. 이후 왕사는 지공 문하에서 수참(修參)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지공은 왕사에게“하늘의 해와 땅의 조사를 모두 다 쳐부수어, 그 경지에 이르면 그것은 무엇인가” 물었다. 왕사는“안팎이 다 붉다”면서 대각(大覺)을 이루게 되었다. 왕사의 입에서 금구(金口 : 부처님의 입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황금이나 금강에 비유한 말)가 흘러 나왔다.
"허공을 꽉 싸안은 그 모습 뛰어나,
온갖 형상 머금었어도 몸은 항상 깨끗하다.
눈앞의 참 경개(景槪)를 누가 능히 헤아리니,
구름 걷힌 푸른 하늘에 가을 달은 밝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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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왕사의 대기대용(大機大用)적 선(禪)은 화두에만 전몰(全沒)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통하여 성성(惺惺)해지므로 개오(開悟)됨을 말씀하였다. 또한 왕사께서는 수행 방법에 있어서 염불도 매우 중요시하였다. 염불을 미타일념으로 담연(湛然)적 청정심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삼악도를 벗어나는 정각의 지름길로 보았다. 아미타불의 서방정토를 별개로 인정하지 않고 선가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정토 자체를 마음에서 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왕사께서는 이론에 치중하여 관념적 성격이 강한 화엄의 법계연기사상(法界緣起思想)을 실천적 행동적으로 개혁 성성심(惺惺心)적 개오(開悟)인 시심마(是甚 ) 선(禪)으로 발전시켰다.
왕사의 대기대용의 시심마 선은 오늘날에도 크게 활용되고 선원의 청풍이 되고 있다. 왕사께서는 회암사에서 고려 우왕 3년(1377)에 입적하였다.
고려 말의 고승 나옹선사의 부도와 석등.
지정번호 경기유형문화재 제50호
지정연도 1974년 9월 26일
소장 회암사
소재지 경기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 산8-1
시대 고려시대
크기 (부도) 높이 3.6m, 가로 1.6m, 세로 1.16m
분류 분류 및 석등
출처 http://blog.daum.net/muti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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