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22. 21:42ㆍ詩,
황혼(黃昏)
햇살은 미닫이 틈으로
길쭉한 일자(一字)를 쓰고…… 지우고……까마귀떼 지붕 우으로
둘, 둘, 셋, 넷, 자꾸 날아 지난다.
쑥쑥, 꿈틀꿈틀 북쪽 하늘로,
내사……
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 싶다.
<1936.3.25>
이별(離別)
눈이 오다 물이 되는 날
잿빛 하늘에 또 뿌연내, 그리고
크다란 기관차는 빼-액-울며,
조그만 가슴은 울렁거린다.
이별이 너무 재빠르다, 안타깝게도,사랑하는 사람을,
일터에서 만나자 하고 ---
더운 손의 맛과 구슬눈물이 마르기 전기차는 꼬리를 산굽으로 돌렸다.
모단봉(牡丹峰)에서
앙당한 소나무 가지에
훈훈한 바람의 날개가 스치고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
한나절 햇발이 미끌어지다.
허물어진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女兒)들이
저도 모를 이국말로
재잘대며 뜀을 뛰고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
<1936.3.24>
가슴1
소리 없는 북,
답답하면 주먹으로
두다려보오.
그래 봐도
후---
가아는 한숨보다 못하오.
<1936.3.25>
가슴2
불 꺼진 화(火)독을
안고 도는 겨울밤은 깊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1936.7.24>
종달새
종달새는 이른 봄날
질디진 거리의 뒷골목이
싫더라.
명랑한 봄하늘,
가벼운 두 나래를 펴서
요염한 봄노래가
좋더라,
그러나,
오늘도 구멍 뚫린 구두를 끌고,
훌렁훌렁 뒷거리길로
고기새끼 같은 나는 헤매나니,
나래와 노래가 없음인가
가슴이 답답하구나.
<1936.3>
닭
한 간(間) 계사(鷄舍) 그 너머 창공이 깃들어자유의 향토를 잊은 닭들이
시들은 생활을 주잘대고
생산의 고로(苦勞)를 부르짖었다.
음산한 계사에서 쏠려나온
외래종 레구홍,
학원에서 새 무리가 밀려나오는
삼월의 맑은 오후도 있다.
닭들은 녹아드는 두엄을 파기에
아담한 두 다리가 분주하고
굶주렸든 주두리가 바지런하다.
두 눈이 붉게 여물도록------
<1936.봄>
산상(山上)
거리가 바둑판처럼 보이고,
강물이 배암의 새끼처럼 기는
산 위에까지 왔다.
아직쯤은 사람들이
바둑돌처럼 버려 있으리라.
한나절의 태양이
함석지붕에만 비치고,
굼벵이 걸음을 하는 기차가
정거장에 섰다가 검은 내를 토하고또 걸음발을 탄다.
텐트 같은 하늘이 무너져
이 거리 덮을까 궁금하면서
좀더 높은 데로 올라가고 싶다.
<1936.5>
오후(午後)의 구장(球場)
늦은 봄, 기다리던 토요일날
오후 세시 반의 경성행 열차는
석탄 연기를 자욱히 품기고
지나가고
한몸을 끄을기에 강하던
공이 자력을 잃고
한 모금의 물이
불붙는 목을 축이기에
넉넉하다.
젊은 가슴의 피 순환이 잦고,
두 철각(鐵脚)이 늘어진다.
검은 기차 연기와 함께
푸른 산이
아지랑이 저쪽으로
양지(陽地)쪽
저쪽으로 황토 실은 이 땅 봄바람이호인(胡人)의 물레바퀴처럼 돌아 지나고
아롱진 사월 태양의 손길이
벽을 등진 섧은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
지도째기 놀음에 뉘 땅인 줄 모르는 애 둘이한 뼘 손가락이 짧음을 한(恨)함이여
아서라!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깨어질까 근심스럽다.
<1936.6.26>
꿈은 깨어지고
꿈은 눈을 떴다
그윽한 유무(幽霧)에서.
노래하는 종다리
도망쳐 날아나고,
지난날 봄타령하던
금잔디밭은 아니다.
탑은 무너졌다,
붉은 마음의 탑이
손톱으로 새긴 대리석탑이
하루 저녁 폭풍에 여지없이도,
오오 황폐의 쑥밭,
눈물과 목메임이여!
꿈은 깨어졌다.
탑은 무너졌다.
곡간(谷間)
산들이 두 줄로 줄달음질치고
여울이 소리쳐 목이 잦았다.
한여름의 햇님이 구름을 타고
이 골짜기를 빠르게도 건너려 한다.
산등허리에 송아지뿔처럼
울뚝불뚝히 어린 바위가 솟고,
얼룩소의 보드라운 털이
산등성이에 퍼-렇게 자랐다.
3년만에 고향에 찾아드는
산골 나그네의 발걸음이
타박타박 땅을 고눈다.
벌거숭이 두루미 다리같이……
헌신짝이 지팡이 끝에
모가지를 매달아 늘어지고,
까치가 새끼의 날발을 태우며 날 뿐,골짝은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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