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어떤 편지 - 도종환 시모음

2012. 7. 10. 07:33詩,

★빈하늘

오늘 하루 - 도종환 어두운 하늘을 보며 저녁 버스에 몸을 싣고 돌아오는 길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이것저것 짧은 지식들은 많이 접하였지만 그것으로 생각은 깊어지지 않았고 책 한권 며칠씩 손에서 놓지 않고 깊이 묻혀 읽지 못한 나날이 너무도 오래 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지만 만나서 오래 기쁜 사람보다는 실망한 사람이 많았다 - 나는 또 내가 만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을 것인가 미워하는 마음은 많았으나 사랑하는 마음은 갈수록 작아지고 분노하는 말들은 많았지만 이해하는 말들은 줄어들었다 소중히 여겨야 할 가까운 사람들을 오히려 미워하며 모르게 거칠어지는 내 언어만큼 거칠어져 있는 마음이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덜컹거렸다 단 하루를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서 오늘도 혁명의 미래를 꿈꾸었다.


★빈하늘

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 도종환 차라리 당신을 잊고자 할 때 당신은 말없이 제게 오십니다. 차라리 당신에게서 떠나고자 할 때 당신은 또 그렇게 말없이 제게 오십니다. 남들은 그리움을 형체도 없는 것이라 하지만 제게는 그리움도 살아있는 것이어서 목마름으로 애타게 물 한잔을 찾듯 목마르게 당신이 그리운 밤이 있습니다. 절반은 꿈에서 당신을 만나고 절반은 깨어서 당신을 그리며 나뭇잎이 썩어서 거름이 되는 긴 겨울 동안 밤마다 내 마음도 썩어 그리움을 키웁니다. 당신 향한 내 마음 내 안에서 물고기처럼 살아 펄펄 뛰는데 당신은 언제쯤 온몸 가득 물이 되어 오십니까 서로 다 가져갈 수 없는 몸과 마음이 언제쯤 물에 녹듯 녹아서 하나되어 만납니까 차라리 잊어야 하리라 마음을 다지며 쓸쓸히 자리를 펴고 누우면 살에 닿는 손길처럼 당신은 제게 오십니다. 삼백 예순 밤이 지나고 또 지나도 꿈 아니고는 만날 수 없어 차리리 당신 곁을 떠나고자 할 때 당신은 바람처럼 제게 오십니다.


★빈하늘

가을사랑 -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 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빈하늘

어떤 편지 - 도종환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만이 한 사람의 아픔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그 숲의 나무들이 시들고 눈발이 몇 번씩 쌓이고 녹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읍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나던 그때는 내가 사랑 때문에 너무도 아파하였기 때문에 당신의 아픔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었읍니다 헤어져 돌아와 나는 당신의 아픔 때문에 기도했읍니다 당신을 향하여 아껴온 나의 마음을 당신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아픔과 나의 아픔이 만나 우리 서로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생각합니다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진실로 모든 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줄 수 있는 동안은 행복합니다


★빈하늘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 도종환 꽃들은 향기 하나로 먼 곳까지 사랑을 전하고 새들은 아름다움 소리 지어 하늘 건너 사랑을 알리는데 제 사랑은 줄이 끊긴 악기처럼 소리가 없습니다. 나무는 근처의 새들을 제 몸 속에 살게 하고 숲은 그 그늘에 어둠이 무서운 짐승들을 살게 하는데 제 마음은 폐가처럼 아무도 와서 살지 않았습니다.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하늘 한복판으로 달아오르며 가는 태양처럼 한번 사랑하고 난 뒤 서쪽 산으로 조용히 걸어가는 노을처럼 사랑할 줄을 몰랐습니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면서 얼지 않아 골짝의 언 것들을 녹이며 흐르는 물살처럼 사랑도 그렇게 작은 물소리로 쉬지 않고 흐르며 사는 일인데 제 사랑은 오랜 날 녹지 않은 채 어둔 숲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마음이 닮아 얼굴이 따라 닮아 오래 묵은 벗처럼 그렇게 살며 늙어가는 일인데 사랑도 살아가는 일인데.

출처 : 빈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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