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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지성체의 허상과 실상 - 지성의 무한한 어리석음의 한계를 넘어서...
    좋은글·名言 2015. 5. 14. 06:42

    사실. 책.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 를 쓰기 전에 검색을 통해서 데카르트의 글들 중에 단순한 몇구절을 보면서. 지식으로써 마음의 실체에 근접한 인물로 생각했다.

    그중 한 구절이. '생각에 의해서 내가 존해함을 아는 것이다'는 구절이었다.

     

    도가의 '화원' 과 '은주' 의 말을 듣고, 다시 그의 책을 보게 되었다.

    두서없는 글들, 요점은 찾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술이 뛰어난 인간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의 글들 중, 한구절을 확인함으로써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 한구절이. 

    '신'이 있다'는 주장이었으며, 신학자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는 말이었다. 

     

    그에 대한 백과사전의 설명이 아래의 내용이다. 

     

    (라) Renatius Cartesius. 1596. 3. 31 프랑스 투렌 라에~ 1650. 2. 11 스톡홀름.

    프랑스의 수학자·과학자·철학자.

    스콜라 학파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처음 반대한 사람으로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모든 형태의 지식을 방법적으로 의심하고 나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직관이 확실한 지식임을 발견했다. 사유를 본질로 하는 정신과 연장(延長)을 본질로 하는 물질을 구분함으로써 이원론적 체계를 펼쳤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 체계는 본유관념으로부터 이성에 의해 도출된다는 점에서 직관주의적이나, 물리학과 생리학은 감각적 지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경험주의적이다.

    데카르트의 목표는 자연에 정통하는 것이었다. 〈세계·광학·기상학·지리학〉에서는 지식 나무의 줄기에 대한 이해를 제공했고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에서는 그 뿌리를 해명한 뒤, 역사·의학·도덕 등 지식의 가지를 연구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역학은 의학이나 생리학의 기초이고 의학 또는 생리학은 도덕심리학의 기초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육체를 포함한 모든 물체가 역학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라고 믿었다(→ 색인 : 기계론). 생리학을 연구하면서 동물의 육체를 해부하여 각 부분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였고, 동물은 영혼을 갖지 않기 때문에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 혈액순환에 대해서도 기술했으나, 심장의 열기가 혈액을 팽창·분출시킨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색인 : 심혈관계). 〈인간, 태아발생론 L'Homme, et un Traité de la formation du foetus〉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1641년 데카르트는 피코와 자크 발레 데바로의 방문을 받고 이 두 사람을 주인공(자신은 조연)으로 대화록 〈진리 탐색〉을 썼으며, 1644년에는 자신의 물리학과 형이상학을 집성하여 〈철학의 원리 Principia Philosophiae〉를 출판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정신과 육체의 통일이며, 정신과 육체는 송과선(松果腺)에서 상호작용하는 서로 다른 두 실체이다(→ 색인 : 심신이원론). 송과선은 두뇌의 기관으로는 쌍을 이루지 않은 유일한 기관이므로 정신과 육체의 합일점임에 틀림없다고 데카르트는 추론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감각기관에 미치는 작용 하나하나가 신경관을 통해 미세한 물질을 송과선에 전달하여 독특한 진동을 일으키고, 이 진동이 감정과 격정을 유발하여 육체의 작용을 야기한다(→ 색인 : 자극반응학습). 예를 들어 어떤 병사가 적을 보고 두려움을 느껴 도망치는 경우처럼, 외부자극에서 시작하는 반사궁(反射弓)은 우선 내부반응을 거친 뒤 육체의 작용이라는 최종 결과에 이른다. 정신은 육체의 반응을 직접 변화시킬 수는 없고, 송과선의 진동을 두려움과 도망을 유발하는 상태에서 용기와 싸움을 유발하는 상태로 변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나아가 데카르트는 인간이 특수한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경험이라는 조건에 좌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색인 : 조건반사).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어린시절 사팔뜨기 소꿉동무를 사랑해 한동안 사팔뜨기 여인만 보면 마음이 끌린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어릴 적 일을 기억해내고는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제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통찰은 그가 자유의지와 정신의 육체조절 능력을 옹호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그와 같은 논변에도 불구하고, 1649년 〈정념론 Les Passions de l'âme〉에서는 인간의 육체작용 대부분이 외부의 물질적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의 도덕관은 반그리스도교적이었다. 데카르트는 칼뱅주의 및 예수회와는 대조적으로 신의 은총구원을 받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진리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데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덕이 쌓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암시했다.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진리발견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데카르트의 낙관적 견해는, 구원을 오로지 신이 내리는 은총의 선물로만 여긴 예수회 운명예정설 변호론자이자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비관적 견해와는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데카르트는 유덕한 행동이 은총보다는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고 말한 12세기 아랍 철학자 아베로에스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난받았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인간의 본성에 깃들어 있는 신의 상징이어서 인간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칭찬이나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오직 타인의 선(善)을 위해 호의를 갖고 행동할 때만 선하며 이러한 관용이 최고의 덕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정념이 그 자체로 선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에피쿠로스주의자였으며, 선을 이해하는 것이 곧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점에서 극단적인 도덕적 낙관주의자였다. 그가 보기에 정념은 자발적인 의지이며, 어떤 것을 원하는 것은 그것을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인간이 세계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자신의 정념을 통제해야 한다고 촉구한 점에서 스토아주의자이기도 했다.

    데카르트는 정치철학에 관한 글을 쓰지 않았지만, 사물들의 질서에 순종하라는 세네카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정을 생애 최고의 거룩한 기쁨으로 여겼기 때문에, 친구를 속이도록 권하는 마키아벨리의 충고는 거부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국가·가족 등 사회집단의 일원일 수밖에 없으므로, 자기 자신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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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 많다보면 옳은 말도 간혹 있을 수 있으나, 그 근본이 이미 어긋난 말들이다.

    소크라테스의 지식과  비교한다면, 데카르트의 그것은 말을 배우는 유치원생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유일한 선은 앎이며, 유일한 악은 지식'이라는 말 한마디가 지식의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다. 물론 '유일한 선은 올바른 앎이며, 유일한 악은 지식이다'는 말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에 바탕을 둔 말이다. 

     

    사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소크라테스 뿐만이 아니라 석가모니의 말의 본질도 그러하며, 예수의 말의 본질 또한 그러하다. 왜냐하면, 언어가 상대적이기 때문이며, 언어의 상대성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을때, 그때 비로소 선과 악이 상대적인 분별일 뿐,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 요지는 매우 단순한 말이다. 

    하루종일 기도하라는 말과. 기도해서 깨어나라는 말. 그리고 '하루종일 기도하여 깨어나는 날, 그날 너희 안에 내가 있으며, 내 안에 너희가 있으며,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는 방식의 설명으로써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 그러니. 네 안에서 신을 찾아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이 인간의 관점으로 왜곡되면서 우상숭배사상의 종교화로 변질되고 왜곡되었으나, 석가모니의 말은 예수의 말보더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이 보존되었는데, 그의 말에는 말을 배우기 이전의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시절에 말을 배움으로하여 앎이 생겨났으며, 그 앎이 '명색'으로써의 앎으로써 올바른 앎이 아니라 '무지'라는 방식으로 설명된다. 예수 또한 '너희가 어린아이시절에 대해서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라는 전제 하에 여러 방편설로써 올바른 인간 삶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석가모니의 말이 한자로 전해지면서 그 뜻이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없도록 변화된 것이지만. 그가 말하고자 했던 본질은 그대로 기록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에 요약하자면. 

     

    12연기법이라는 내용에 보면.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생. 사. 노, 병... 등이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무명과 행과 식, 그리고 명색이다.

     

    무명과 행이라는 말은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의 행위를 일컷는 말이며, 어린아이가 말을 배워서 말을 인식함에 대해서 '식'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며, 識은 '지식이라는 앎'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 識으로 표현되는 앎이 올바른 앎이 아니라 '명색'으로써의 앎으로써 '이름과 형상'의 동일시로써 올바른 앎이 아니라, 무지라는 뜻이다.

    이런 말에 대한 방편으로써의 대표적인 말이 '별은 별이 아니다'는 말이며, 이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는 말과 같은 뜻이며, 소위 '달이 뭐라카드나'라는 속어와도 같은 뜻이다.

     

    달이 본래 달이 아니라, 어떤 것의 이름이 달이라는 뜻이다. 어떤 과일의 이름이 '사과'라는 뜻이다. 만약에 '사과'라는 글자를 쓴 종이와 '과일'을 책상위에 올려 놓는다면... 어떤 것이 진짜이겠는가? '사과라는 글자'가 진짜 사과가 아니라, '과실'이 진짜 사과라는 뜻이다.

    사과라는 이름(名) 과 '사과(色)가 같은 것이라는 앎이 착각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인간들의 '자아'라는 말 또한 어떤 것에 대한 이름일 뿐,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 인간들의 모든 지식이 이와 같이 허무맹랑한 것이다.

    이름과 형상과의 동일시에 대한 착각에 의해서 '내가 있다, 내가 실존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인 것들은 주체가 사라지거나 대상이 사라지면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다. 사실. 모든 언어가 이와 같다.

     

    귀신은 귀신이 아니다.

    영혼은 영혼이 아니다.

    더 나아가 '나는 나가 아니다' 라는 말이다.

    '무아'가 아니라 '무아상'이라는 말이다.

     

    선과 악이라는 분별 또한 그러하다.

    나와 너 또한 그러하다.

    그대가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나' 가 없다.

    '나'가 없다는 생각도 없으며, '나'가 없다는 말도 없다. '없다는 것'도 없다. 그런 상태에 대해서 '본무, 본래무일물'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며, 예수는 그런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창조'라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분명한 말은 하나님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말이다.

     

     

    지성체는 '통찰'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통찰이라는 말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도를 깨달은 사람'이다. 그리고 인간세상에 도를 깨달은 사람은 오직 '노자와 장자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석가모니, 예수' 뿐인 것 같다. 그들의 남겨진 말로 볼때 그렇다는 뜻이다.

     

    사실. 상카라의 불이일원론이라는 책의 요약서를 보니. 그의 말이 가장 보편적인 말로 설명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아의 본질에 대한 설명에서. 뱀과 새끼줄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기 때문이며, 이원성이나 다양성이 허구라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뱀과 새끼줄의 비유는. 인간들의 '내가 있다'는 주장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에 대한 비유로써 가장 적절한 비유이다.

     

    뱀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 오솔길을 걷다가 길가에 놓여 있는 새끼줄을 보고 놀라서 도망쳤다. 만약에 그 놀란 사람이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다면, 그 사람에게 그것은 뱀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는 방식이다. 만약에 그 사람이 다시 되돌아 가서 그것이 뱀이 아니라, 새끼줄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은 두려움으로 남을 까닭이 없다는 방식이다.

     

    사실 인간이 오래살고 싶어하는 까닭은 삶이 즐겁거나 기쁨이라서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는 어린아이시절부터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죽음'이라는 말, 말, 말, 말들에 대해서 두려워 하는 것이다. 자신이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차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지라고 하는 것이며, 더군다나 죽음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서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사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공된 말,말, 말들에 의해서 죽음을 두려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험이 오류이다.

    순수의식의 어린아이에게는 '내가 있다'는 생각이 없으며, '내가 사람이다'는 생각도 없다. 그런 생각이 있다는 생각도 없으며, 없다는 생각도 없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또는 다른 것이다 라는 분별심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책 깨달음의 실체를 밝힌다' 와 책 '비밀의 언어'에 설명된 내용들에 대해서 요약한 내용의 일부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성체들의 '내가 있다'는 말이나, '실존'이라는 말, 말, 말들... 모두가 사실적인 앎이 아니라 허구적인 앎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만족하여 평화로울 수 없는 까닭은 이와 같이 '나 아닌 것'에 대해서 '나다'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실적인 앎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대가 진정한 지성체라면, 이젠 그 지식을 버려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며, 인간이 진정한 자유와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의 실체에 대해서 이해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주가 먼저 있던 것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이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보는 자가 있기 때문에 대상이 있는 것이며, 보는자가 없다면 우주 또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대의 '나 아닌 나' 그것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의 기원이다. 

    여기에서 '그것'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까닭은. 상대적인 언어로써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자의 도관에서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 도' 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너 자신을 알라. 그러면 모든 것을 아는 것이며, 

    네가 너 자신을 모른다면, 살아갈 가치조차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자신을 성찰하여 검증된 삶을 살라는 말이 그들 성인들의 가르침이다. 

     

    그대와 인류에게 영원한 평화 있기를. 

     

    일념명상의 집 '도가' ---> http://blog.daum.net/powwr116/?t__nil_login=myblog 

    출처 : study of boodda
    글쓴이 : 진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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