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가슴으로 읽는글] 아범아! 내아들아 ! 外

2012. 8. 1. 12:00좋은글·名言

 

 

 

아범아! 내아들아 !


오늘의 세태를 너무나 잘 쓴 노래사연이기에

눈시울 적시며 옮겨봅니다.
 
세상이 하도 험하니 우리 자식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을  할수 있는 분이 얼마나 있을른지요?

우리 앞날은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너무나 가슴아픈 사연이기에 공감하고자 보냅니다.
                  
                 
 
작사,작곡,노래 : 능인(스님)/아범아! 내 아들아!
 
  
1, 아범아 내 아들아 날 제발 데려가다오
          밥 굶어도 나는 좋고 헐벗어도 나는 좋단다 
        너의 얼굴 바라보면 밥 먹은듯 배가부르고
         너와 함께 사는것은 옷 입은듯 나를 감싸니
       애비야 내 아들아 제발 날 좀 데려 가다오

2, 어멈아 내 며늘아 날 제발 데려가다오
        우리 손주 재롱보며 행복하게 살고 싶구나
       달이가고 해가가도 그리운건 너희 얼굴들
      가고파도 갈 수 없는 기구한 나의 운명을
       애미야 새 아가야 제발 날 좀 데려 가다오

3, 아가야 내 손주야 날 제발 데려가다오
      너의 애비 키우던 정 아직도 변함 없는데
     이 할미를 원망할까 니 애비를 미워할까
       애지중지 키운자식 세월 따라 멀어만가니
        아가야 내 손주야 제발 날 좀 데려가다오.
   

 

 
노래 작곡,작사의 사연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
                    
  역시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는 며느리,
 
  거기에 대학을 다니고 있는 손자,
 
  그러나 그러한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아서
                      
  양로원을 찾아가야만 했던 어머니,
       
  그것도 오후에 아들 며느리가 함께 동승하여
 
  차를 태워서 이름모를 길에 내려 주면서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라고 해 놓고
 
  다음날 새벽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 아들과 며느리.
                           
  양로원에 갔다가 어느 할머니의 가슴아픈 사연을 듣고 
 
  나는 아연실색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말씀 한 마디면

 

공무원과 교육자라는 신분을 가진 

             
아들과 며느리가 과연 안전 할 수가 있을까 ?
 
  그러나 그 할머니는 자식이 그리워
 
  눈물로 지내시면서도
 
  우리 아들이 잘 돼야 한다고 하시니  
       
도대체 부모님의 마음은 그 깊이와 높이가 어디까지인가 ?
 
  이 노래는

 

19년전 예천 연꽃 마을에 방생법회를 갔을 때 만난 

 
  어느 할머니의 가슴아픈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하루하루 아들을 그리워 하는  

 

할머니의 애타는 마음을  노래한 이 노래는

 

고학력 자식일수록 부모님을 외면하는
 
 이 시대의 뼈아픈 현실이 안타까와서 
 
 용기를 내어 지어본 것이다.
 
 일부의 젊은 사람들은 싫어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이 슬픈 현실을
 
 어디에 가든지 자신 있게 노래로 부를 것이다. 
 
아롱거리는 아지랑이 처럼 이 시대 효의 정신이

 

  아물아물 다시 피어 오르는 그날 까지....
 
 
                     

 Robin's Nest

I can't imagine anyone of any age not enjoying this!
 

The video clip in the link below is amazing.    

 

An American robin lays her four eggs in a hanging basket

  

and the home owners set up a camera to film the results.  

 

To see it all,
 click here.

 

一朶紅(일타홍)의 사랑

 

조선 선조 때 錦山(금산)에서 태어난 一朶紅(일타홍)이

어떤 연유로 "한 떨기 꽃" 이라는 妓名(기명)으로 기적에 오르고,

10대 후반에 한양으로 올라오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당대에 뛰어난 용모와 노래 솜씨 그리고 춤으로 이름을 날렸던

일타홍은  비록 기녀 신세였지만 그녀에게는 남다른 꿈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직접 벼슬길로 나아갈 수는 없었지만

기상이 크고 호방한 낭군을 만나서

자신은 이루지 못할 꿈을 대신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총명하고 영리했던 일타홍은 미모까지 겸비한

당대의 명기로서 중요한 연회에는 빠지지 않고 불려 다녔다.

게다가 시문에도 밝고, 관상을 보는데도 뛰어나

여러 남자를 상대하면서 꿈에 맞는 낭군을 찻고 있었다.

일타홍이 권문세가의 路柳墻花(노류장화)가 되어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중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세가인 이 판서의

잔칫집에 불려가  술 시중을 들고 있었다.

당대의 정승과 전직 대신들이 참가한 술자리가

자못 위엄스럽고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자

사이사이에 앉은 기생들이 흥을 돋우기 위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대감들의 비위를 맞추었다.

차츰 취흥이 돌고 화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갑자기 난봉꾼 같은 젊은 남자가 술자리에 끼어들었다.

허락도 없이 음식을 마구 집어먹으며 술자리를 휘젓고 돌아다니자

점잖은 대감들의 얼굴에 노기가 가득했다.

그 난봉꾼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글 공부라고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던 沈喜壽(심희수) 였다.

술과 여자, 먹을 것을 무척이나 밝히던 심희수는 상가 집이나

잔칫집 등 술을 마실 수 있는 자리가 생기면 으레 모습을 드러내고

멋대로 행동하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아예 반미치광이처럼 취급해 상대조차 하지 않고 슬슬 피하였다.

그러나 일타홍의 눈에는 심희수가 왠지 남다르게 보였다.

지금 하는 행동들은 자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한 것일 뿐,

그의 얼굴에는 호탕한 기운이 서리고 눈에는 예기가 번뜩여 대뜸

재상의 재목감이었다.

일타홍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대감들이 둘러앉은 대청마루로 성큼

올라선 심희수는 기생들을 훑어 보더니

일타홍 옆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따가운 눈총을 보내고

분위기가 어색해져도 그는 히죽이 웃을 뿐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았다.

일타홍 또한 심희수를 거절하지 않고 공손히 술을 한 잔 따르며

그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술자리가 다시 화기애애해져 사람들이

심희수를 신경 쓰지 않게 되자,

일타홍은 조용히 심희수를  밖으로 끌어내 말하였다.

"술자리가 끝나면 집으로 ?나갈 터이니 기다리세요"

잔치를 마친 저녁 무렵 일타홍은 약속대로

심희수의 집 대문을 들어섰다.

심희수와 그의 어머니 박씨에게 인사를 올린 그녀는 모친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마님! 저는 금산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는 기생 일타홍 이옵니다.

오늘 어느 재상집 잔치에서 귀댁 공자를 뵈었습니다.

모두가 미쳤다고 하나 저의 소견으로는 장차 귀하게 될 상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준비를 하지 않고

헛되게 낭비하면 훌륭한 기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마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오늘부터 화류계를 청산하고

이 댁에 들어와 온갖 힘을 다해

귀댁 도련님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겠습니다".

"내 아들을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면

내 집에 들어오는 것을 어찌 막겠느냐.

다만 집이 가난하니 너같이 호강하던 애가 어찌 참고

견디겠느냐".

"마님! 저는 부귀와 영화를 탐내 이 댁에

오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럴 욕심이면 어찌 가난한 집

도련님을 유혹하겠습니까?

아들을 포기한 상태였던 어머니 박씨는

일타홍을 기쁘게 맞이하였다.

그날로 일타홍은 심희수의 색시가 되어 한집안 식구가 되었다.

그날 밤 잠자리부터 요구하는 심희수를

일타홍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四書五經(사서오경)을 내놓았다.

"소첩은 살다가 도망가는 일은 없을 것이니,

이 책을 1권씩 떼면 잠자리를  허락하겠습니다".

그러자 심희수는 일타홍을 차지하기 위해

그날부터 盧守愼(노수신)의 문하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심희수는 워낙 머리가 비상했기에

공부를 시작한 지 2년도 안 되어

고금의 詩書를 모조리 통달하여  급제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일타홍은 그런 그가 조금만 게으름을 피워도 엄하게 꾸짖었고

심희수의 글공부는 나날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타의에 의해 시작한 공부였기에

심희수는 다시 공부에서 손을 놓기 시작하였고,

일타홍은 심희수가 과거에

급제를 하면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떠나고 만다.

심희수는 뒤늦게 일타홍을 찾아 다녔으나 찾을 길이 없었고,

진심으로 마음을 다잡은 심희수는 공부에  정진하기 시작하였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뒤 마침내 심희수는

22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인 1572년(선조 5) 에는 별시 문과에 급제해 심씨 집안에는

드디어 경사가 났다.

일타홍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짧은 행복

 

대과에 급제한 심희수는 당시의 관례대로 三日遊街삼일유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

친척을 방문하던 일) 를 하던 중

달마 노인이라 불리는 어른의 집에서

드디어 일타홍과 재회를 하게 된다.

일타홍은 심희수가 등과 후 재상에게

인사를 드리러 올 것을 예견하고 미리 와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 이별 끝에 함께하게 된 둘은 집으로

돌아왔고, 주위 사람들은 일타홍의 뒷바라지 덕분이라며

모든 공을 그녀에게 돌리며 기뻐했다.

그러나 일타홍의 마음은 한없이 아팠다.

그녀는 천한 기생의 신분이라 숙명적으로

정실부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낭군을 장가보내기로 결심을 한 일타홍은

입술을 깨물며 나직하게 말하였다.

"어머님!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이제 아드님에게

마땅한 배필을 얻어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진작 말씀드리지 못한 것은 아드님 공부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였습니다.

저의 소원이니 꼭 들어주세요".

이 사실을 알게 된 심희수는 일타홍 외 다른 여인과는

부부의 연을 맺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사대부가 기생을 정실부인으로 삼는 것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라며 설득하는 일타홍의 뜻을 따라

양반집 규수 盧克愼(노극신)의 딸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일타홍은 갓 들어온 새색시를 깍듯이

예우하여 일을 처리할 때도 부부간이나

외동서 간에 말다툼 한 번 없었다.

이 일은 마침내 선조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에 감동한 임금은

친히 두 사람을 불러 그동안 있었던 일을 물었다.

당시 법도로 정경부인 아닌 일개 천기

출신을 임금이 부른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선조가 소원을 묻자

일타홍은 남편 심희수를 자신의 고향인

금산 군수로 제수해 줄 것을 청하였고,

임금은 기쁜 마음으로 윤허하였다.

심희수가 금산 군수로 부임하자

일타홍은 군수의 부실이 되어  금의환향하였다.

그녀는 옛집을 찾아가 부모님을 찾아뵙고,

사흘 동안이나 일가친척을 위로하며

잔치를 베풀어 금산 일대에  소문이 자자했다.

한편 일타홍은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하여

친척들에게 관청은 여염집과 다르니

함부로 드나들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이별의 슬픔

 

일타홍은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만

소실인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기도 하고 

또 남편을 오랫동안 차지한 것이

정실부인에게 죄스러워 자살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일타홍은 일단 마음을 굳히자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날 삶의 회한이 사무쳐 와  달을 보며 시 한 편을 지었다.

 

   賞月 (달을 보며)

亭亭新月最分明우뚝 솟은 초승달 오늘 따라 밝고

一片金光萬告情 조각 달빛  만고에 정다워라.

 無限世間今夜望넓고 넓은 세상 오늘 밤 달을 보며

      百年憂樂幾人情백년의 슬픔과 즐거움 느끼는 이 몇일까.

 

일타홍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둔 채

유서를 남기고는 저 강을 건너셨다.

  

遺書(유서)

 

"서방님!  오늘로써 이별코자 합니다.

원컨대 귀한 몸이니 오래도록 부귀를 누리시고

소첩 때문에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그리고 소첩의 몸은 심씨 선산에 묻어주시오".

 

뜻밖의 일을 당한 심희수는 텅 빈 가슴을 달래면서

며칠을 슬피 울다가 일타홍을 자신의 선산인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흥리에 묻기로  결정하였다.

 

 

일타홍을 실은 꽃상여가 금강에 이르자

홀연 가을비가 소소하게 내려

사람들의 마음을 한없이 구슬프게  했다고 한다.

 

 

심희수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휩싸여

통곡하면서  시 한 편을  남겼다.

 

 

 一朶芙蓉載한 떨기 고운 꽃이 상여에 실려        

     芳魂何事去躊躇 향기로운 혼이 가는 곳 더디기만 하네

 錦江秋雨丹旌濕 금강에 가을비 내려 붉은 명정 적시니

疑是佳人別淚餘 그리운 내 임의 눈물인가 보다

 

 

  만남과 헤어짐은 하늘이 만든  운명인가?

 아! 알 수 없는  삶이여  슬프다!  한없이-

 

 

일타홍의 단소 비석 뒷면에 있는 일타홍과 심희수와 시(詩) -

 

 

 
'당신말이 맞소'
 
아침밥을 먹는데 작은아들이 물었다.
 "아빠, 맹세가 무슨 뜻이에요?" "맹세? 한자어 맹서(盟誓)에서 온 맹세 말야?
 무엇을 꼭 이루거나 지키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것이지"
"그런데 결혼식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고
맹세해놓고
 왜 이혼하는 부부들이 많아요?"
"그때는 그랬지만, 살다 보면 사랑이 식거나 성격이 너무 안 맞아 그러지, 뭐."
"나는 한번 맹세하면 악착같이 지킬 텐데."
 "그래, 그래서 맹세를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야."
 
 
아들과의 대화 끝에 최근 들은 어느 부부의 얘기가 생각났다.
사반세기 동안 우리와 가깝게 지내 어지간한 가정사도 아는 사이다.
 우리 부부도 그렇지만, 그 집도 처음부터 둘의 성격이 워낙 맞지 않아
늘 티격태격하기 일쑤였다.
 
 아이들을 키울 때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지만,
아이들이 스물이 넘게 장성하여 둘만의 시간이 많아지자
걸핏하면 말다툼하는 일이 많아졌다.
 남들은 '제2의 신혼' 어쩌고 하는데,
그 집은 정반대로 치달았다.
 
아내는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남편은 아내의 잔소리와 유별나게 따지는 성격에 죽을 맛이었다.
취미도 너무 달랐다. 남편은 술과 담배, 커피 아니면 잠자기 등
아내가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했다.
 
 아내는 학교 선생님답게 지성이 풍기기를 원했건만,
어깃장만 놓는 남편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한번 밉게 보이니, 연애할 때에는 마음에 들던 넓은 이마나
잘생긴 코까지 보기 싫다고 했다.
 
 아이들과 주변의 눈이 있어 갈라서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
그저 속앓이만 하면서 '한 지붕 두 가족' 으로 한동안 산 적도 있다.
주변에서도 '혹시 저러다 진짜로 찢어지는 것은 아닌가' 염려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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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부부가 언제부터인가 확연히 달라졌다.
백두대간을 같이 다니는가 하면,
서로의 취미도 존중해주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비결'을 물었다.
"앞으로는 여자들 말만 잘 듣기로 했다"는 답이었다.
 여자들이라니? 아내와 자동차 내비게이션에서 길을 안내하는
'내비 걸(Navi girl)'이란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니까,
 
가훈(家訓)을 아예 "당신 말이 맞소"로 정했다고 한다.
뭔가 비위에 맞지 않아 화가 날 때에도 얼른 "당신 말이 맞소"라고 하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되더라는 그의 얘기를 듣고 살포시 감동했다.
 
 
아내 역시 남편의 눈부신 변화에 동참,
남편의 언행이나 주장이 마음에 안 들어도 곧잘
"당신 말이 맞소"라며 맞장구를 친다는 것이다.
 그 말만 하면 둘이 얼굴을 맞대고 웃어버린다고 한다.
 
 "정 상대방 말이 옳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럴 경우엔 "그건 당신 말이 틀린 것 같소" 라고 말하며
토론으로 합의점을 찾는다고 한다. 무릎을 쳤다.
우리보다 더 불안해 보이던 그들에게서 기가 막히게 좋은
가훈을 선물 받은 것 같아 기뻤다.
 
"당신 말이 맞소"라는 가훈으로 '인간승리'가 아니라
'가정승리'(家庭勝利)를 한 부부의 실례(實例)를 들으며 느끼는 바가 많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 주변에 있는 아무 물건이라도 던지고 싶어질 때,
한번쯤 아내(또는 남편)의 입장으로 돌아가
"당신 말이 맞다"고 해보면 어떨까.
 
나는 잘 쓰지 못하는 붓글씨지만
"당신 말이 맞소"를 한지(韓紙)에 큼지막하게 써
액자로 만들어 그 부부에게 선물할 생각이다.
 
 

어느 한국 학생의 이야기

 

 

캘리포니아 유학중인 어느 한국 학생의 이야기이다.
학기 등록 때 고국의 부모님으로부터 등록금과 생활비를
받을 때 마다 고국에 계시는 부모님께 죄송스런 마음이였다.
부모님의 어려운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조금이라도 그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서 방학시즌때 요세미티 공원
나뭇가지 벌목 알바이트 일을 하게 됐다.
한 푼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모우기 위해 비장한 결심까지 했다.
점심을 굶고 그 돈을 절약하자.
   
점심시간이 되어 동료 미국인 일꾼들이 샌드위치로
점심식사를 하는 시간에는 배고파 먹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돈 절약하기 위해 점심 굶는다는 말은 
차마 자존심 때문에 하지 못하고 위염으로 점심을 
먹지 말라는 의사의 지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핑계를 둘러대면서 나무밑에서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는 척 했다
 
이 때 동료 작업인부 중에서 이 말은 거짓이며
돈을 절약 위해 힘들게 배고픔을 참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미국인 인부가 있었다.
저 한국 알바이트 학생의 위염 때문에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돈을 아끼기 위해
일부러 굶고있다. 얼마나 배고플까.
어떻게 저 사람 자존심 건들리지 않게 하면서
내 샌드위치를 좀 나눠 줄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 그 알바이트 학생에게 까지 들리게 
큰 소리로 갑자기 말하기 시작했다.
 
에이 미련한 마누라.내 어찌 먹으라고
오늘 샌드위치를 이렇게 많이 싸 준거야
다 먹지 못하고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겨 가면 자기의 성의도 모른다고  
잔소리 할 텐데 ....
어이 한국학생 자네 날 좀 도와줄 수 없겠나 ?
보다시피 이 샌드위치 나 혼자선 도저히
다 못 먹을 만큼 양이 많으니
자네가 나 대신 좀 처분해 줄수 없겠나?
  
그 알바이트 학생은 몇 번 사양하는 척 하면서
결국은 그 미국인 인부의 간곡한 청을 들어 준다는
입장에서 그 인부의 샌드위치를 나눠 먹게 되었다
그 날 이후부터 그 알바이트 학생은 남에게 점심을
공짜로 얻어 먹는다는 자존심 상하는
생각 없이 오히려 그 미국인 인부를 도와준다는
입장에서 계속해서 샌드위치를 얻어 먹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돈을 모아 등록을 한 후 다음 학기
방학 때 이 학생은 그 때 자기에게 샌드위치를 작업시즌
끝날 때 까지 공짜로 나눠먹게 해준
고마운 미국인 인부에게 인사를 하기위해 살고 있는 마을로 찾아갔다.

그러나 숙소 경비원이 그 사람은 

작업 나가고 지금 집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 그 분 부인이라도 뵙고 인사를 드리고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숙소 경비원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 부인이라니?
그 사람은 3년 전에 부인을 잃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독신으로 혼자 사는데.. "
 
그제서야 한국학생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련한 우리 마누라 내 어떻게 먹으라고 샌드위치를
이렇게 많이 싸 준거야 " 그 말은 모두가 나의 자존심 건드리지 않게
하면서 자기 샌드위치를 나눠주겠다는 그 마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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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경기를 보신 아버지 

 

 어느 미국소년의 이야기이다.

중학교 다닐 때, 그는 작은 체격에 말라깽이였다.

그러면서도 풋볼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는 코치에게 애원한 끝에

축구팀에 들어간 후, 온 힘을 다해 선수가 되려고 애썼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 보다 너무나도 체격이 작아 늘 후보 선수로서

다른 선수들이 뛰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어야 했다.

 

이 소년은 어머니 없이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시합 때마다 벤치에만 앉아 있었는데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나와 아들 팀을 열렬히 응원했다.

 

 소년은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도 그는 풋볼팀을 찾아가서

자기를 선수로 뽑아달라고 간청했다.

 

그의 왜소한 체격을 보고 모두가 불합격하리라고 예상했다.

뜻밖에도 그는 풋볼팀에 뽑혔다.

코치는 그의 넘치는 투지와 열성이

다른 선수들의 사기를 높이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자기가 팀에 뽑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아들 이상으로 기뻐한 아버지는 당장 전시즌 티켓을 샀다.

대학에서도 그는 4년 동안 단 한 번도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단 한 번도 시합에 나가지 못했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시합을 맞아 전과

다름없이 경기장에서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그에게 코치가 한 장의 전보를 전해주었다.

 

그는 전보를 뜯어보고는 한마디 말도 없었다.

한참 후 그는 코치에게 머뭇거리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오늘은 제가 연습을 걸러도 괜찮겠습니까? “

 

코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하면서

”토요일 시합 때 안 나와도 좋으니 이번

주말까지 집에 가 있어라“ 라고 말했다.

 

시합날인 토요일이 왔다.

시합은 그의 팀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제 3쿼터에 들어가 10점이 뒤지고 있을 때

뜻밖에도 그가 선수복을 입고 나타났다.

 

그리고 코치에게 간청했다.

“제발 이번 한번 만은 시합에 출전시켜 주십시오.

오늘은 꼭 뛰어야 합니다.“

 

 

코치는 애써 못들은 척했다.

가뜩이나 뒤지고 있는 경기에 단 한번의

경기출전 경험도 없는 미숙한 후보선수를

내보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코치에게 매달리다시피 애원했다.

 

측은한 생각이 든 코치는 그의 출전을 허락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상황을 코치와 다른 선수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단 한번의 경기경험도 없는 그가 누구보다도 잘 뛰는 것이었다.

 

그는 천하무적이었다.

전의를 상실하기 시작했던 그의 팀이

그가 들어온 다음 득점을 하기 시작해 드디어 동점을 이루었다.

 

경기종료 몇 분을 남기고 그는 상대방 공을

가로채 터치다운을 하는데 성공했다.

경기장 안은 함성으로 터져나갈 듯했다.

 

경기가 끝나고 모든 선수가 축하파티를

위해 자리를 비운 탈의실 구석에 그가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을 코치가 발견했다.

 

 

코치는 그에게 “오늘 너는 정말 멋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냐?”라고 물었다.

그는 나직이 코치에게 말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장님이었다는 사실은 모르셨죠?

아버지는 모든 경기를 보러 오셨지만 제가 뛰지 못한 것을 모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돌아가셨기 때문에 오늘 처음으로

제가 경기하는 모습을 하늘에서 보실 수 있었답니다.“

“전 제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그의 볼에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because 사랑, even though 사랑
사랑, 모두 입을 열어 말한다.
사랑은 아무 조건 없이 하는 것이다,"라고..
정말 그럴까..?!
나는 이런 영어문장을 읽고 단번에 외웠다.
너무 마음에 와닿는 문장이어서.. "True love isn't a love any more when you say, 'Because' You should say 'even though' when you love."
진정한 사랑이란 당신이 '~ 때문에' 라고 할 때 진정하지 않고 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 이지만' 이라고 해야 한다.
위의 사진을 자세히 보면
그녀가 참 귀여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귀여운 여인'이 약혼을 했다가 파혼당했단다.
그 까닭은 뻔하다.
"Beacuse she is so fat."
 
이런 경우도 마찬가지로 because love 다.
"당신은 너무 아름답고 젊어요."
세월이 흘러서 그 젊고 예쁜 여인이, 늙어서 볼품 없이 바뀌면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담겨져 있다.
이런 사랑이 진짜다.
당신은 뚱뚱하지만 사랑해요.
당신은 늙었지만...가난하지만...'성불구자'이지만..
I love you even though you are not only old but also ugly.
even though 사랑이 영원하다.

   

약을 팔지 않으려는 약사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 어귀에 약국이 하나 있다.
몇 년 사이에 주인이 세 번쯤 바뀌었는데,
이번에 간판을 건 사람은 꽤 오래 하고 있다.


어쩐 일인지 먼저와는 달리,
약국 안 의자에는
동네 사람들이 늘 모여 앉아 있곤 한다.


지나다 보면,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수더분한 인상의 여주인이
사람들과 얘기하는 모습이 보인다.
약국 규모도 점차 늘어나는 듯하다.

그 약국 여주인을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날, 시내에서부터 머리가 아파
집으로 오는 길에 약국에 들렀다.


반갑게 맞아주는 그녀에게
"두통약을 달라"고 했더니,
"좀 쉬면 괜찮아질 거"라면서
찬 보리차를 꺼내 한 컵 따라준다. 

 

그러면서 "되도록 약은 먹지 말라"고 한다.
생각지 않은 처방에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약국을 나와 집으로 오는데,
더위 속에서 한 줄기 소나기를 만난 듯 심신이 상쾌해졌다.
그 후로 자연스럽게 그녀와 허물없는 이웃이 되었다.

외출을 하거나 산책을 나갈 때면 그 약국을 지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유리문 안으로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녀를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약만 구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궂은일, 기쁜 일들을 털어놓는다.
그렇다고 그녀가
전문 상담역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웃의 일을 내 일인 듯 마음을 열고 들어주는 것이다
.

약을 팔려고 애쓰지 않는 약사,

그녀는 약으로만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람들을 치유해 주고 있다.
그래서 그 약국은 날로 번창하는 것 같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철강왕의 눈물

 


포스코 포항서 `보고 싶었습니다.

뵙고 싶었습니다` 퇴직직원과 만남의 행사 가져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 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포항제철소 퇴직자들과 추억을 회상하는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포스코 박태준 명예회장이 19일 포항 지곡동 포스코 한마당 체육관에서 포스코 재직시절 함께 근무했던 퇴직직원들과 만남의 행사를 가진 자리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 대형스크린에 잡히자 참석자 전원은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이번 행사는 박태준 명예회장과 퇴직직원들이 19년 만에 재회해 함께했던 추억들을 되새기고 불굴의 용기와 도전정신으로 포항제철소 건설을 위해 힘써왔던 지난시절을 회상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행사에는 박태준 명예회장이 재직했던 당시인 1993년 2월까지 포항제철소에 근무했던 직원들 중 현재 포항에 거주하는 만 55세 이상의 퇴직자를 대상으로 초청됐으며 37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행사장에 도착한 포스코 퇴직직원들은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과 반가움에 서로 껴안고 악수를 나눴으며 일부는 기쁨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눈시울을 붉혔다. 행사장 로비에는 박태준 명예회장이 재직시절 촬영되었던 사진들이 전시돼 참석자들이 지난 시절 기억을 되새기며 즐거운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박 명예회장은 퇴직직원들에게 “눈부신 성장을 이룬 오늘의 대한민국은 여러분의 피땀흘린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청춘을 바쳤던 그날들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며 우리의 추억이 포스코의 역사 속에, 조국의 현대사 속에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말했다.

이에 퇴직직원 대표 강봉기씨는 “세계 제일의 제철소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각자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왔다는 자부심이 있기에 오늘의 이러한 영광스러운 자리가 더욱 감격스럽고 뜻깊게 느껴진다.”며 “많은 추억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내왔던 제철소에서의 행복했던 기억들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고 말했다.

이 행사는 박태준 포스코명예회장과 같이 근무했던 1993년 2월 이전 퇴직한 직원들 중 일반, 반장, 주임, 기성단을 대상으로 55세 이상이면서 포항 거주자로 선정했다.

.


 

“내게 맞은 조인트 어때” …

“그 상처가 경제대국 만들어”




“19년 만이네요”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19일 포스코 한마당 체육관에서 열린 퇴직 임직원들을 위한 문화행사에 참석했다. 400여 명의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던 박 명예회장이 1971년부터 20년 동안 근무한 한윤교씨(75·전 포스코 압연부 안전담당)와 악수하고 있다.

[포항=프리랜서 공정식]



박태준(84) 포스코 명예회장의 입가가 떨리기 시작했다. 10여 초가 흘렀을까.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사람들이 박수를 치자 던진 박 회장의 첫마디. “미안합니다….”

 19일 오후 6시30분 경북 포항시 남구 지곡동 포스코 한마당체육관. 박 회장은 1992년 10월 자신이 포스코에서 퇴직하기 전까지 근무했던 현장근로자 400여 명과 재회했다. 한국 철강산업의 역사를 함께 만든 무쇠 영웅들이 다시 한자리에 뭉친 것이다.

 단상에 오른 ‘철의 사나이’도 남다른 감회 앞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그의 입가는 떨렸고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미안하다”는 말에 이어 나온 박 회장의 목소리는 근로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여러분 뵈니까 눈물부터 나옵니다.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박 회장은 환영사를 하는 내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영일만 모래벌판에서 청춘을 보내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지만 우리는 후세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희생하는 세대였다”고 회상했다. 또 “대한민국이 눈부신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동력은 여러분의 피땀이었다”고 덧붙였다.

 호랑이 눈썹을 휘날리며 현장을 휘젓는 박 회장은 근로자들에게 호랑이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철의 형태를 만드는 압연부에서 일한 한윤교(75)씨는 “회장님이 팔뚝 길이의 지휘봉을 들고 현장에 뜨는 날이면 모두가 덜덜 떨었다. 나오면 뭘 지적하는데 그게 너무 정확해 꼼짝할 수 없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박 회장의 일명 ‘조인트 까기’도 회자됐다. 총무과에 근무했던 강원수(67)씨는 “회장님이 현장순찰 나왔다가 현장이 지저분한 걸 보고 담당자 ‘화이바’를 지휘봉으로 때렸다. 그때 지휘봉이 부러지는 걸 보고 기절할 뻔했다”며 웃었다.

 포항제철소 제3고로를 지을 때 공기가 두 달가량 늦춰지자, 박 회장은 이를 앞당기라는 불가능한 미션을 내리기도 했다. 이를 위해 전국의 레미콘차가 모두 포항에 집결했다. 김창섭(75·압연부 근무)씨는 “24시간 공사를 하는 와중에 콘크리트 기사들이 조는 걸 막기 위해 직원들이 그 옆에 타 감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전했다. 이에 박 회장은 “콘크리트 타설이 공기를 단축하는 데 큰 영향을 줘 내린 조치”라고 설명했다. 졸음 금지 명령은 직원들에게도 떨어졌다.

김씨는 “야간근무 하면서 졸다가 걸리면 옷을 벗어야 했다. 당시 회장께서 중요한 국가시설을 졸면서 지키다간 큰 손해가 난다며 단속했다”고 기억했다. 박 회장은 또 “역사적인 사업을 하는 데 뛰어든 직원들을 교육시키려면, 교육자가 무서워야지. 누구라도 나한테 혼났을 거야”라고 웃었다. 이에 한 퇴직자는 “그 가르침과 상처가 오늘날 한국이 세계 경제대국이 되는 데 밑바탕이 됐다”고 화답했다.

 박 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도 거론했다. 그는 “그분을 잊을 수 없다”며 울먹였다. 박 회장은 “제철소가 있어야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다는 그분의 신념과 의지로 포항제철이 있었다. 온갖 정치적 외풍을 막아준 굴다리 역할을 해줬다”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2004년 ‘박태준’ 평론을 쓴 이대환 작가는 “지난해 55세 이상 퇴직자를 중심으로 제철보국의 국가적 소명을 이룩하고 근대화의 중심에 우뚝 선 박 회장님을 뵙고 싶다는 건의에 따라 이런 자리가 마련됐다”며 “한국이 선진국 진입을 준비하면서 포스코의 도전정신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자리”라고 말했다.

중앙일보 2011.09.20

포항=한은화 기자
사진=프리랜서 공정식

◆박태준=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했다. 육사 6기 출신. 대한중석 사장을 거쳐 68년 포항제철 사장이 된 뒤 우리나라 철강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81년 11대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국무총리를 지냈다.


美 아프간 상이군인-예일대 출신 커리어우먼 ‘순애보’



    미국 워싱턴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며 사랑을 키워가는 댄 버신스키 중위

     

    (오른쪽)와 레베카 태버 씨. 버신스키 중위가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

     

    두 다리를 잃은 후 그의 재활과정을 지켜본 태버 씨는 “그는 두 다리를 잃었지만

     

     나를 얻었으니 결코 손해를 본 것이 아니다”라는 농담을 던질 정도로

     

    사랑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갖고 있다. 사진 출처 워싱턴포스트 웹 사이트

     

     

     

    “그가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가 가진 장점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죽음의 문턱까지 갔지만 좌절하지 않고 이겨내는 것을 지켜보며 삶에 대한

     

    열정과 용기, 유머를 알게 됐습니다. 만약 그가 두 다리를 잃지 않았다면

     

     지금쯤 헤어졌을걸요.”

     

     

     

    올해 25세의 레베카 태버 씨는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 두 다리를 잃은

     

    남자친구 댄 버신스키 육군 중위를 보며 밝게 웃으며 이렇게 농담을

     

    건넨다. 그만큼 그에 대한 사랑은 굳고 탄탄하다.

     

     

     

    버신스키 중위가 두 다리를 잃고 평생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 하는

     

    처지가 됐을 때 태버 씨가 그의 곁을 계속 지킬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태버 씨는 “그가 부상을 당한 후 함께 지낸 2년 동안 그에 대한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됐다”고 말한다. 워싱턴포스트는 전장에서

     

    두 다리를 잃고 전역한 27세 버신스키 중위와 그의 부상 후에도 사랑을

     

    키우며 미래를 설계해가는 태버 씨의 스토리를 9일자 1면 머리기사로 소개했다.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2009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태버 씨는

     

    예일대를 졸업하고 세계적인 컨설팅회사 매킨지에서 근무하는 재원이었다.

     

     예일대 시절 학생회장까지 맡았던 그는 지적이고 얼굴도 예뻐 친구들

     

    사이에 ‘예일대의 내털리 포트먼(하버드대 출신의 젊은 실력파 여배우)’

     

    으로 불렸다.

     

     

     

    태버 씨가 처음 친구를 통해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 출신인

     

    버신스키 중위를 소개받았을 때 중위는 아프간 배치를 2주 앞둔 때였다.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지만 미래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 男 “내가 다리가 없어도 괜찮냐”… 女 “멋진 두 팔을 가졌잖아요” ▼

     

     

     

    그가 아프간으로 떠난 후 e메일을 주고받았지만 심각한 얘기는 삼갔다.

     

     전쟁터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랑 얘기는 너무 사치스럽다고

     

    두 사람 모두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달 후쯤 태버 씨는 친구를 통해 중위의 부상 소식을 들었다.

     

    탈레반과의 교전이 치열한 아르간다브 계곡 지역에 배치된 그가

     

    땅 속에 묻혀 있던 지뢰를 밟고 두 다리를 잃었다는 것이었다.

     

    태버 씨는 인터넷에서 다리를 잃은 사람들의 사진을 찾아보며

     

    중위의 얼굴을 그 위에 겹쳐봤다.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자신을 위로했다. ‘남자는 긴 바지를 입으니까 괜찮을 거야.’

     

     

     

    태버 씨는 그해 9월 중위가 워싱턴 월터리드 병원으로 후송된

     

    후에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중위의 가족들이

     

    “빨리 잊으라”며 두 사람의 만남을 막았다. 태버 씨는 가족을

     

    설득해 겨우 중위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이의 친구로서

     

    옆에서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중위의 상태는 태버 씨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오른쪽 다리는 엉덩이 아랫부분부터 모두 잃고

     

    왼쪽은 넓적다리 부분만 약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다리를 잃은 충격에도 불구하고 당시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동료들을 먼저 애도하는 중위의 모습을 보면서 태버 씨의 마음속에는

     

    ‘미래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중위는 안타까워하는 태버 씨를 오히려 “두 다리를 잃었지만

     

    두 손은 있으니까 괜찮다”며 위로했다.

     

     

     

    점점 태버 씨의 마음이 중위에게로 쏠리는 것을 눈치 챈 태버 씨의

     

    친구와 가족들은 “동정과 사랑을 혼동하지 말라”며 말렸다.

     

    그러나 중위를 간호하면서 사람 됨됨이를 알게 된 태버 씨는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남자친구를 돌보기 위해

     

    잘나가는 컨설턴트 자리까지 포기하고 업무량이 적은 델라웨어

     

    교육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너그러운 사람에게 복이 온다


만사종관(萬事從寬)이면

기복(其福)이 자후(自厚)니라.

解釋 : 모든 일에 관용(寬容)을 따르면

복이 저절로 후하게 된다.

解說 : 매사에 관대 해야만

많은 복을 받는다.


조선 중종(中宗) 때 사람 정광필(鄭光弼)은

임금에게는 바른 말을 잘 하였으나,
아래 사람들에게는  항상 관대하여
명재상(名宰相)이란 이름을 얻은 인물이다.
 
그가 젊어서
한번은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가게 되었다.
한 고을 원이 관청의 재산을
많이 축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까지 오게 된 정광필은

왠일인지 곧장 관아로

달려 들어가지 않고
하룻밤을 주막에서 묵고
이튿날 가자는 것이었다.

조금 이상하게 생각한 역졸이
까닭을 묻자,
정광필은 이렇게 말 하였다.


"무식한 무인(武人) 수령이

법 두려운 줄을 모르고
나라 곡식을 축냈을 것이니,
지금 들어가 조사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곳에서 자면

그도 반드시 우리가 온것을 알고
채워놓을 것은 채워
장부 정리를 할 것이다."

 


이튿날
정광필은 사유를 갖추어 조정에 보고하여
그 원님을 파직 하는데 그쳐
목슴을 구명하게 해 주었다고 한다.

아랫 사람의 크나큰 과실도

관용으로 덮어
 
구명도생 하게 한 정광필의 너그러움과
이를 탓하지 않고
어진 사람이라 칭송하여
 
훗날 명재상의 반열에 오르게 한 
세상의 인심이 그리워서....
 
 
 

실직을 기회로 만든 사람 


미국의 홀리데이인 호텔을 건축한

윌리스 존슨이라는 사람은 원래 조그마한

제재소에서 일하던 목공입니다.

 

그는 40 살  때 직장에서 정리 해고를 당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회사로부터 이런 통고를 받습니다.

“존슨, 이제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되네

이 일은 자네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 같네.”

 

존슨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최악의 불황이었습니다.

 

여러달 동안 취업을 못했고 가진 돈도 다 떨어지자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 차라리 죽는 게 났겠오.

수백통의 이력서를 내봤지만 오라는 데가 없소.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다른 회사에서 유능한 당신을 채용해주지 않는다는 거죠?

그 사람들이 바보라 유능한 당신을 몰라봐서 그래요. 

그러면 당신이 회사를 하나 만들면 되지않아요?"

 
딱히 다른 방도도 없는 존슨은 아내의 말대로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조그만 건축업을 시작하였다.

 

그의 재능이 활짝 꽃을 피웠습니다.

사업이 번창하여 5년만에 조그만 기업이 되었고

몇년 후에는 세계적인 체인점인 홀리데이 호텔이 되었다. 


                                                       훗날 존슨은 이렇게 회고한다.

 

                                                  “나를 정리해고한 사람에게 감사한다

왜냐하면 그 날의 고통이 축복의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하나의 다른 문이 열린다."

 

오늘의 명언 :

 삶의 가치가 실현되는 것은 먼후일에 어떤 목표가 

달성되는 그 순간에 있는것이 아니라 높은 이상을 

  향해서 한걸음 한걸음 접근하는 그날  그날의 신천 

 과정속에 있다.                                             

  

오늘의 상식 :

 사람이 살수있는 체온은 27도에서 45도 사이이다.



출처 : 돌아보면 멀지도 않은데...
글쓴이 : 밀레니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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