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설장수와 그시

2013. 3. 7. 23:55詩,

 

서감(書感) -설장수(偰長壽)

生理貧恒絆(생리빈항반) 생활에는 가난이 항상 따르고,

歸期亂每妨(귀기란매방) 돌아갈 기약은 매양 난리가 방해한다.

㶅魚誰肯濟(학어수긍제) 물 마른 곳 고기 누가 기꺼이 건져줄까.

巢燕自徒忙(소연자도망) 집짓는 제비는 다만 스스로 바쁘구나.

道路風塵暗(도로풍진암) 길에는 바람먼지 어둡고,

箕裘事業荒(기구사업황) 기구 세업은 거칠어졌도다.

倚樓溟海闊(의루명해활) 누대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나니,

萬里逈蒼蒼(만리형창창) 만리 휑하니 푸르기만 하구나.

*설장수(偰長壽,1341충혜왕 복위 2~ 1399정종 1).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천민(天民), 호는 운재(芸齋). 아버지는 부원후(富原侯) 손(遜)이다. 원나라 고창(高昌)에 살던 위구르인으로, 1358년(공민왕 7)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와서 귀화했다.

1362년에 문과에 급제,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가 되었다. 이때 왜구(倭寇)를 막아내는 일이 급선무라고 하면서 대책을 피력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곧이어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임명되었고, 1387년(우왕 13)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선양[瀋陽]의 유민 4만 여 호에 대해 진정했다. 1389년(창왕 1)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우왕 양위의 표문(表文)을 가지고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해 이성계의 제안을 받아들여 공양왕을 세우는 계획에 참여했고, 그 공으로 이듬해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으며, 정난공신(定難功臣)이 되었다. 1392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승진하여 지공거(知貢擧)를 겸하고 있다가 정몽주가 살해될 때 그 일파라는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 유배되었다. 1396년(태조 5) 검교문하시중에 복직되었으며, 계림(鷄林:지금의 경주)을 본관으로 하사받고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398년 정종이 즉위한 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저서로 직해소학(直解小學)·운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출처 : 기봉이재은
글쓴이 : gibo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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