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백범 선생의 김구 명언과...

2012. 10. 21. 19:15좋은글·名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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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음력 7월 11일)~1949년 6월 26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27년부터 1933년까지, 1940부터 1948년 8월 15까지 제6대, 8대, 10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과 주석을 지냈다.

아호는 창암(昌巖)이고, 호는 백범(白凡)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2007년11월 5일, 2009년 상반기 중 발행될 10권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었다.

 

-부인 최준례(오른쪽)와 장남 김인(가운데 있는 이)-

파일:1920 김구 가족.jpg

 

백범  선생의  김구  명언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가장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국방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만이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타인에게도 행복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서곡에 불과했다.
이제부터는 우리 나라가 주연배우로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당당하게 서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가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을 창출하여
세계의 모범이 되는 나라가 되기를 희망한다.
우리 민족의 정신과 재능, 과거의 혼이 그러하였고,
우리 나라의 지리적
조건 또한 그러하며, 인류의 요구와,

새로운 나라를 고쳐 세워야 할 당면한
민족의 시기가 그러하다.


 



 

'너의 소원은
무엇인가?' 라고
하느님께서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저의 소원은 오직 대한의 독립입니다." 라고 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인가?' 라고
물으시면


 

나는 또 다시
"우리 나라의 독립입니다." 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인가?"

라고

세 번을 물으셔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저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완전한 자주
독립입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 나라가 자주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은 일을 해보고 죽게 허락하소서!

 

나는 내가 못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다 하더라도
나는 한 명의 국민이자.

 

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 온 것이다.


얼굴이 잘 생긴 것은
몸이 건강한 것만 못하고,


몸이 건강한 것은
마음이 바른 것만 못하다.

 


 

조국이 없으면 민족도 없고,
민족이 없으면 당이라든지,

사상,

특정한 단체 또한 존재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현 시국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유일이자 최대의 과업은
좌파와
우파의 합작 독립의 쟁취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몸을 반쪽으로 나눌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볼 수 있겠는가!
가련한 동포들이 남북으로 흩어져 떠도는 꼴을 어찌 차마
더 볼 수 있겠는가!

 

 

파일:1919년 임시의정원.jpg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


어떠한 모략이나,

짐승 같은 추악한 마음도
치열한
애국심 앞에서는 언젠가

 

그 정체가 탄로날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동족끼리 해방 이후 3, 4년 동안이나
38선이라는 국경 아닌 국경으로 서로 나뉘어져
외국인의 턱만 쳐다보며
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소련식 민주주의가 좋다고해도,
공산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그르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독점 자본주의로 인해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상품을 팔기 위한 시장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1948년 4월 평양 을밀대에서
왼쪽부터 선우진, 김규식, 김구, 원세훈 순


우리는 진실로 국제적으로 평등한 입장에서
남북의 친선을 촉진하면서,
우리 삼천만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 스스로가 잘 살 수 있게 하는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자주독립의 조국을 원할뿐이다.

나는 3.8 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추구하지 않겠노라!

 

우리 동포가 몸은 3.8선을

자유로이 넘나들지 못한다고 하여,
어찌 마음으로 3.8 선을 용납 할 수 있으리오.
미국과 소련 양국이 저들 멋대로

 

3.8 선을 고정시키고,
우리의 형제 자매를 갈라놓고,
이남에 하나의 정부와 이북에 또 다른 정부를 만들려고 하니,

 

이는 곧 '세계 열강의 분열을 우리의 분열로'
'외부의 분열을 내부의 분열로' 만들어 가는 것이며,
그 목적으로 3.8선을 우리의 염통과 뼈에 새겼던 것이다.


아! 그 뿐이랴, 장차 분열 뒤에는
골육상전(민족간의 혈전)이 뒤따를 것이니,

 

우리 민족의 생존에 그 이상의 위협이
또한 어디 있으리요!

 

-38선에서-

 

민주주의는 어느 당파의 특정한 당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의 복종,
이 세 가지에 의해 결정됨이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가 힘을 합쳐서 세운 천당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데,
나는 우리 민족을 그 곳으로 이끌고 들어가지 않겠노라.

내 몸이 남의 몸이 될 수 없음과 마찬가지로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으며,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보다 더 완전한 영원함은 없다.

 

무릇 한 나라와 한 민족이

주체성을 갖추고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
그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고
더러는 이 나라의 사상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지하고 저희들 끼리
추태를 보이게 된다.

 

자유와 비자유의 차이는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에서 왔느냐는 것에 달렸다.
즉, 자유가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가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한 사람 또는 한 계층에서 나온다.


 

광복군 성립전례식에 참석한 김구 (우측)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 투쟁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개인의 행복 또한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계급 투쟁은 끝없는 계급의 투쟁을 낳고,
국토에 피가 마를 날이 없을 것이다.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치면,
천하가 나를 이기심으로 해할 것이니,
조금 얻고 많이 빼았기는 우를 범하지 말지어다.


 

-김구, 안창호, 이탁-

 

경찰서
10개보다는
교회 1개를 세우는 것이 더 낫다.

의심하는 사람이면 쓰지를 말고,
쓰는 사람이라면 의심하지 말라.

 

파일:KimGu and YoonBongGil.JPG
1932년 4월 윤봉길과 함께

 

 

파일:3의사 유해 환국.JPG
1946년 5월 25일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유해 서울역에서 (오른쪽 두번째가 김구)

 

大鵬逆風飛 生魚逆水泳
(대붕역풍비 생어역수영)

커다란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헤엄친다.


 파일:1919년 임시의정원.jpg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

 

우리 스스로 잘 살고 더불어
인류 전체가 의좋고 즐겁게 살도록 하자.

 

네 인생의 발전을 원하거든
너 자신의 과거를 엄하게 스스로 비판하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덕을 쌓고 네 앞날을 개척할지어다.


 

38선에서 모습

 

마음 속의 3.8선이 무너져야
땅 위의 3.8선도 무너질 수 있다.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으로도
충분히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

 
 

파일:Syngman Rhee and Kim Gu in 1947.jpg


 덕수궁에서 이승만과 함께 1947년

 

인류가 불행해지는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며,

사랑이 부족한 까닭이다.


 

개인의 자유를 주창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저마다
자기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한 그런 자유가 아니라,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는 자유어야 한다.

또한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여야 한다.


파일:Yi Dong-nyung.jpg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보람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들인 것이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든 일은 내가 앞서 행하니
그것은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이는사랑하는
자가 잘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이 추구했던 인후지덕(仁厚之德)이란 그런 것이다.


-경무국장 시절 카이젤 콧수염으로 단장한 김구 (1920년)-
 
 

踏 雪 野 中 去 서산대사
(답설야중거)


不 須 胡 亂 行 (불수호난행)
今 日 我 行 跡
(금일아행적)
遂 作 後 人 程 (수작후인정)

 

눈 덮힌 들판을 걸을 때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말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후인들의 이정표가 되리니!!


-서산대사의 詩, 김구의 좌우명-

 

 

김구 (1949년)
김구 (194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9·10대 국무령
임기 1926년 12월 14일~ 1927년8월
부통령 없음
전임: 홍진 (제8대)
후임: 이동녕 제11대)

대한민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16·17·18대 주석
임기 1940년3월~ 1947년 3월 3일
국가 부주석 김규식
전임: 이동녕제15대)
후임: 이승만제19대)

출생일 1876년 8월 29일(1876-08-29)
출생지 대한제국 조선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
사망일 1949년 6월 26일 (72세)
사망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 종로구 경교장 2층 거실
정당 한국독립당(1928)
한국국민당(1935)
(통합)한국독립당(1940)
종교 유교(성리학→동학→불교→개신교→천주교(교명 베드로)
배우자

최여옥(약혼 중 사망), 최준례

 

 

김구(金九, 1876년8월 29일(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자이자 종교인이며,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몰락 양반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 때 승려로 활동했으며 이후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경찰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정부 내 노선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을 이탈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녔으며,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동경 의거, 윤봉길훙커우 의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 부터 1927 년까지 1930년 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무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에게서 받은 정치 자금을 사회주의자들에게만 나눠주던 김립을 암살했고, 자신의 부하였다가 사이가 틀어진 안공의 암살 배후 의혹을 받기도 한다.

해방 후에도 존 하지 브루스 커밍스 등에 의해 송진의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으며, 송진우 암살 직후 미군정청 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경고를 받기도 했다. 1947년12월장덕수 암살 사건 때는 현장에서 한국독립당원이 검거되면서 재판정에 서기도 했다. 1948년에는 반(反)이승만 쿠데타 기도 의혹을 받기도 했다. 또한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1]하려다가 실패하였으며 이것이 미 군정의 첩보에 입수되기도 했다.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2][3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김두래, 장진, 장진구라는 예명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을 얻은 승려였으며[4], 신민회에서 활동한 개신교 신자였던 김구는, 후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죽기전에 병자성사를 받았다. 천주교 세례명은 베드로5]   이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파일:백범 김구.JPG

38선에서 모습                           Arirang - George Winston(피아노)
                                                                                   -2012.08.16.-

 

 

출처 : 청산아 청산아
글쓴이 : 청산아 청산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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