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양 / 이건청
아버지의 등뒤에 벼랑이 보인다.
아니, 아버지는 안 보이고 벼랑만 보인다.
요즘엔 선연히 보인다.
옛날, 나는 아버지가 산인 줄 알았다.
차령산맥이거나 낭림산맥인 줄 알았다.
장대한 능선들 모두가 아버지인 줄 알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었다.
푸른 이끼를 스쳐간 그 산의 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는 것이라고,
수평선에 해가 뜨고 하늘도 열리는 것이라고.
그때 나는 뒷짐 지고 아버지 뒤를 따라갔었다.
아버지가 아들인 내가 밟아야 할 비탈들을 앞장서 가시면서
당신 몸으로 끌어안아 들이고 있는 걸 몰랐다.
아들의 비탈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까마득한 벼랑으로 쫓기고 계신 걸 나는 몰랐었다.
나 이제 늙은 짐승 되어 힘겨운 벼랑에 서서 뒤돌아보니
뒷짐 지고 내 뒤를 따르는 낯익은 얼굴 하나 보인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쫓기고 쫓겨 까마득한 벼랑으로 접어드는
내 뒤에 또 한 마리 산양이 보인다.
겨우겨우 벼랑 하나 발딛고 선 내 뒤를 따르는
초식 동물 한 마리가 보인다.
아버지의 밥그릇 / 안효희
언 발, 이불 속으로 밀어 넣으면
봉분 같은 아버지 밥그릇이 쓰러졌다
늦은 밤 발씻는 아버지 곁에서
부쩍 말라가는 정강이를 보며
나는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아버지가 아랫목에 앉고서야 이불은 걷히고
사각종이 약을 펴듯 담요의 귀를 폈다
계란부침 한 종지 환한 밥상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밥을 남겼고
우리들이 나눠먹은 그 쌀밥은 달았다
이제 아랫목이 없는 보일러방
홑이불 밑으로 발 밀어 넣으면
아버지, 그때 쓰러진 밥그릇으로
말없이 누워 계신다.
아버지의 나이 / 정호승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등 / 정철훈
만취한 아버지가 자정 넘어휘적휘적 들어서던 소리
마루바닥에 쿵, 하고 고목 쓰러지던 소리
숨을 죽이다 한참만에 나가보았다
거기 세상을 등지듯 모로 눕힌 아버지의 검은 등짝
아버지는 왜 모든 꿈을 꺼버렸을까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검은 등짝은 말이 없고
삼십 년이나 지난 어느날 아버지처럼 휘적휘적 귀가한 나 또한
다 큰 자식들에게 내 서러운 등짝을 들키고 말았다.
슬며시 홑청이불을 덮어주고 가는 딸년 땜에 일부러 코를 고는데
바로 그 손길로 내가 아버지를 묻고 나 또한 그렇게 묻힐 것이니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서러운 등짝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검은 등짝은 말이 없다.
아버지의 유작 노트 중에서 / 허수경
...여행을 한다, 겨울 속으로 눈은 끝없이 내리고, 새는 후두둑...,
인적의 바퀴는 눈에 쓸려가고 우렁우렁...
雪山이 대답하는 고요... 나는 발견한다... 대숲...,
너무 좋아서, 맨발의 아가처럼
연록의 저 천진, 천진은 애리다
...며칠을 서성인다, 들어가지 못하고,
저 숲의 속은 자궁처럼 고요하리라 탯줄처럼,
황홀의 타원 쭈글쭈글한 주름 벽의 황홀...
정말 가지고 싶은 것은 가져서는 안 된다,
인적의 바퀴처럼 지나온 것들은 마땅히 묻을 것을 묻어준다...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이 나의 일생이었도다...
그러나 끝내 비틈한 어깨여
쓰러지고 싶지는 않았으나 끝내 쓰러지리라...
쓰러진 위에...
위에 발자국을 지우며 하얀 녹음 밑의 시커면 개골창...
나의 돌아감을 나여 허락하라
나는 나에게 밖에 허락을 간구할 때가 없나니
아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